알제리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티비린(Tibhirine) 수도원에서
여덟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영화 '신과 인간'은
그 침묵의 여정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고요함 속에 피어나는 진실
깊은 밤, 수도원 예배당.
형제들은 원을 그리고 앉아
서로의 가슴을 열어 보입니다.
크리스티앙 수사가 군부의 보호를 거절한 일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공기는 긴장으로 차 있지만
그 속에서 거룩한 무언가가 숨 쉬고 있습니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아무도 말을 자르지 않습니다.
침묵은 그들 사이에 놓인
은총의 다리가 됩니다.
첫 번째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
진실은 우리가 서두를 때가 아니라
기다릴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지금 서두르고 있습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결정을 내릴 때
충분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크리스토프 수사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두려움에 떨며 기도합니다.
"기도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그의 울음소리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어둠을 일깨웁니다.
두려움을 직면하는 용기 없이
어떻게 빛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불안과 공포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갈등을 충분히 드러내고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며
풀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함께 걷고, 홀로 서는 일
수도사들의 하루가 흘러갑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흩어져 각자의 일을 합니다.
크리스티앙은 홀로 산책을 하고,
뤼크는 환자들을 돌보며 생각에 잠기고,
크리스토프는 고독한 기도 속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일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 리듬 속에 깊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때
진실의 한 조각을 보고,
홀로 고요해질 때
또 다른 조각을 발견합니다.
수도원 담장 너머로 위험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그들은 이 리듬을 잃지 않습니다.
각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의 일상을 지켜갑니다.
단체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개인의 결정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함께 모이는 시간과 홀로 있는 시간,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빠른 결정과 효율을 추구하다가
영혼의 리듬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 목소리의 지혜와 소명의 점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나누며
수도사들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뤼크 수사는 마을 아이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지혜를 묵상하고,
새벽 기도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그들은 어느 한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전통의 목소리,
몸의 목소리,
이웃의 목소리,
자연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함께 춤출 때,
분별은 깊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점검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왜 이 일에 헌신했는지를
더욱 명료하게 할수록
지금 앞에 놓인 결정도
더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권위 있는 한 사람?
다수의 의견?
아니면 더 깊은 곳에서 오는
다양한 생명의 목소리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얼마나 자주 점검합니까?
일상에 묻혀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열에서 일치로
첫 투표에서 그들은 나뉘어집니다.
떠나자는 사람,
남자는 사람,
결정하지 못한 사람.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수결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대화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강요나 조작 없이,
그들은 마음의 일치에 이릅니다.
남기로 한 결정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서 동시에 피어난
꽃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합의입니다.
단지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길을 걸어
같은 장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함께 분별한다는 것은
서로 머리로만 논쟁하고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녹여내는
기도와 예배,
다양한 수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의사결정은 어떻습니까?
다수결의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뜻을 따르거나,
아니면 표면적 평화를 위해
반대 의견을 침묵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늘의 응답, 내면의 확증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수도원에 울려 퍼집니다.
수도사들은 음악에 잠겨
서로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눈물이 그들의 뺨을 적십니다.
이 순간, 그들은 알았을까요?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음악이 될 것임을?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다는
내면의 확증을 얻습니다.
논리적 증명이나 성경 구절이 아닌,
아름다움과 평화라는
하늘의 언어로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눈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수도사들은 그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 순간에도 영혼의 확증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행동으로 표현되는 순간입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서,
함께하는 사람들,
섬김의 대상들,
자연과 기도,
일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
계속 들려오는 하늘의 메시지와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을 때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은
조금씩 잠잠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늘의 응답을 알아듣습니까?
논리와 분석만으로?
아니면 아름다움과 평화,
그리고 몸으로 움직이는 행동 속에서도
하늘의 뜻을 읽을 줄 알고 있습니까?
선택의 용기
크리스티앙 수사의 유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오늘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곳의 모든 외국인을 삼켜버리는
테러의 희생자가 된다면,
나는 내 공동체, 내 교회, 내 가족이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내 삶은 하나님과 이 나라에 바쳐졌다는 것을..."
그들의 분별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거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두려움에 반응하는 대신
목적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세상이 불안정하고
교회가 위기를 맞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선택하고 있습니까?
안전을 위해?
편안함을 위해?
아니면 더 깊은 목적을 위해?
우리의 발걸음으로
티비린(Tibhirine)의 수도사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물음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함께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진실에 귀 기울일 것인가?
어떻게 개인의 내면 여정과
공동체의 여정을 함께 엮어갈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진실을 말하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모이고 흩어지는
리듬을 존중하는 것.
이 분별의 지혜는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무엇을 읽고, 어떻게 기도하며,
나의 시간과 자원,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지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일지도 모릅니다.
티비린(Tibhirine)의 수도사들이
알제리의 토양에 심은 씨앗은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그 씨앗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도,
우리의 교회 안에서도 자랄 수 있기를.
우리가 함께 분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고,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기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가장 어려운 결정조차도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가는 법에 대한
거룩한 증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티비린(Tibhirine) 수도사들이 건네는
따뜻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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