凝 002
모른다고 해서 멈추면 안 되는 세상이니까
박다빈
SI 솔루션 · UX 기획자 · 디자인 전공

디자이너인데 디자인이 강점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박다빈님은 자동차 디자인을 좋아해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내 강점은 비주얼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약점이라면 보통 감추고 싶기 마련인데, 그는 그걸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았다. 모른다고 멈추기보다, 모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자기 길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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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자취
강점이 어디 있는지 알고 나서야
박다빈님은 처음엔 디자이너를 꿈꿨다. 자동차를 좋아해 자동차 디자인 입시까지 준비했는데, 막상 해보니 자기 길은 조금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옮겨 간 곳이 디자인학부였다. 시각, 제품, 미디어가 한데 모인 과에서 1학년 때 여러 분야를 두루 경험하면서, 비주얼이 자기 강점은 아니라는 걸 차차 알게 됐다.
대신 다른 데서 자기와 잘 맞는 일을 발견했다. 코딩으로 미디어를 다루는 수업에서, 논리적으로 구조를 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일이 재미있고 잘 맞았던 것이다. 디자인 기본기보다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시스템을 짜는 쪽. 그게 자기 자리에 가깝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고 한다.
"내 장점은 디자인 기본기보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시스템을 짜는 쪽이구나."
방향은 거기서 잡혔다. UI에 관심은 있지만 비주얼이 강점은 아니었던 만큼, "UI 디자이너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기로 했다. 스타트업 창립 멤버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부딪쳐본 경험, UI를 다뤄본 경험이 쌓이면서, 그게 모두 기획할 때 도움이 됐다.
02
두 번째, 일의 실체
기획자가 코드를 직접 짜기 시작했을 때
개발과 디자인의 언어를 어느 정도 아는 기획자는 실무에서 소통이 한결 수월해진다. 개발자에게 "이거 API 연동 가능한가요"라고 먼저 물을 수 있고, 무작정 기능을 들고 가면 원하는 대로 구현이 안 될 수 있다는 걸 미리 안다. 개발 쪽에서 "우리는 백엔드 없이 퍼블리싱 단계까지만 갈 거예요"라고 하면, 백엔드가 들어가는 요소는 빼고 기획해야겠다고 바로 판단한다. 서로의 언어로 대화가 되니, 디자이너에게도 레퍼런스로 방향성을 명확히 줄 수 있다.
지금 그가 AI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은 제안서와 화면 정의서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실무 용어를,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한 번에 알아듣게 깔끔히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문서를 "전달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일이다.
"그때 '어, 이게 되네' 싶었어요. 개발 언어를 몰라도 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구나."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다. 넷플연가라는 플랫폼에서 클로드 코드로 바이브 코딩을 해 프로토타입을 띄워봤는데, 개발 언어를 몰라도 자기 아이디어가 화면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생각이 트였다고 한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구체화할 수 있겠구나.
가장 짜릿했던 결과물은 법인카드 정산 자동화다. 부모님 회사 업무를 보다가, 영수증을 올리면 회사 양식에 맞춰 엑셀로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처음엔 OCR로 사진을 찍어 올리면 양식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하려 했지만, 개발 도메인 지식이 없으니 막막했다. 에러가 나도 그게 뭔지, 어떻게 디버깅하고 아키텍처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다 스터디원이 "이 정도면 next.js로 개발 가능하다"고 짚어주며 길이 열렸다.
맨 처음 그 화면이 떴을 때가 제일 짜릿했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도 못 한 걸 풀어내는 걸 보며, "이 기능 바꾸고 싶어"라고 하면 5분이면 바로 수정되니 속도가 따라왔다. 지금은 다음 단계를 보고 있다. 사람이 입력하거나 엑셀을 거치지 않고, 파일만 올리면 전 과정이 딱딱 만들어지게.


AI에게 일을 맡기는 방식에도 그만의 원칙이 있다. 곧바로 던지지 않는 것이다. 먼저 요구사항과 기술 스펙을 자기만 이해하는 메모로 정리한 뒤, 그걸 그대로 주는 대신 한 번 더 프롬프트 형태로 다듬는다. AI와 몇 차례 주고받으며 요구사항을 구체화한 다음 전달해야 결과의 정확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피드백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준다. 무엇을 의도했는지, 결과가 왜 어긋났는지, 어떤 화면의 어떤 기능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를 정확히 짚어 방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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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AI 시대
안심보다 두려움이 먼저 왔어요
그는 링크드인 글에 "취업했는데 안심보다 두려움이 먼저 왔다"고 적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안도보다 "이대로 멈춰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앞섰다는 것이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세상이 워낙 빨리 바뀌어서다. 지금 일하는 곳은 안정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검증된 방식을 신중하게 다루는 환경이다. 그게 그 일의 미덕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쪽에 더 끌리는 사람이었다. 회사가 아쉬웠다기보다, 자기 갈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 셈이다.
디자이너 일을 AI가 대신하는 풍경을 그는 두 마음으로 바라본다. 동기들 입장에선 걱정이다. 올해 같이 졸업한 동기 중 취업한 사람이 30%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겐 편한 마음도 있다. 예전엔 손으로 하나하나 했던 작업을 이제 빠르게 구현할 수 있으니, 오히려 디자이너에게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던 장면도 하나 꺼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임원까지 지낸 분이, 퇴임 후 막국수집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일이다. 새로운 도전이긴 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한계를 그때 깊이 느꼈다고 했다.
"모르면 모른다에서 끝나면 안 되는 시대예요"
그렇다면 기획자라는 직무가 위태로워지는 시대에, 끝까지 놓치면 안 되는 역량은 뭘까.
그는 망설임 없이 문제 해결을 꼽았다. 어떤 회사의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이 기능을 넣을 것인가, 그걸 판단하는 사람. 예전엔 위에서 내려온 오더를 실무자가 결과물로 만드는 구조였지만, 그 실행은 이제 AI가 빠르게 해버린다. 그래서 앞으로 가장 중요해지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디렉터", 곧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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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재정의
나는 내 직무를 이렇게 다시 부른다
직무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그는 자기 일을 이렇게 다시 부른다. "문제 해결사"라기보다,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걸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 모든 걸 간편하게 풀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
지향점도 분명하다.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보다, 누구와도 아이디어를 나누고 실현하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 다만 제일 잘하는 것 하나는 끝까지 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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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후배에게
정석은 없으니까 내 길을 차근차근
디자인 전공 후배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실패에 관한 것이었다. 요즘은 "네이버나 카카오에 가지 못하면 실패"라고들 많이 생각하는데, 그런 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대학 때 마음껏 실패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자신도 스타트업에서 실패해본 것이 지금까지 도전을 이어가는 발판이 됐다. 아는 만큼 보이니, 일단 많이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같은 길 위에서 흔들리는 동료들에게는, 아버지 친구분이 해줬다는 말을 건넸다. 운칠기삼, 운이 7이고 기가 3이라는 것. 지금 잘 안 된다고 자책할 필요 없이, 너무 애쓰지 말고 꾸준히 하다 보면 때가 온다는 이야기다. 그 자신도 주식 시장의 표현을 빌려 "포모(FOMO) 오지 말자"고 자주 다짐한다.
"정석은 없으니까. 남과 비교는 하지 말고, 내 길을 차근차근. 단, 나 자신은 객관적으로 보면서요."
凝 ABOUT
첫 번째 시리즈 〈AI 시대, 시장은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
일터에서 가장 두꺼운 층을 이루면서도, 가장 적게 불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자리에 서 있고, 그래서 이 기록은 거기 있는 사람들을 응시합니다. 직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 여러 분야와 연차의 사람들이 변화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는지, 자기 일을 어떻게 다시 부르는지 옮겨 적습니다.
글 / 편집 : 최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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凝, 002호,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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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잘 읽었습니다!! 다빈님 작업하시는 건 옆에서도 같이 지켜봤었는데 하나하나 익혀가시면서 눈이 반짝반짝 하시고, 또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해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요즘은 정말 나의 업은 내가 정의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싶어서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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