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혀입니다.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사반세기 전 글을 꺼내봅시다.
1996년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의장이었던 빌 게이츠가 1996년 마이크로소프트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입니다.
제목은 "콘텐츠가 왕이다(Content is King)"입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빌 게이츠는 "PC와 모뎀만 있으면 누구나 창작한 콘텐츠를 발행할 수 있다"면서 대중 콘텐츠 전 분야에 걸친 치열한 경쟁을 예견했지만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터넷이 번창하려면 콘텐츠 제공자들이 작업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가 제시한, '대가'의 수단은 광고와 구독료 두 가지였습니다. 콘텐츠를 무료로 즐기는 대신 광고료를 받거나, 콘텐츠를 유료로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는 것인데요. 후자의 경우 "전자 결제에 드는 비용과 수고로움"이 현실적인 장애물이라고 봤습니다.
빌 게이츠는 "머지않아 몇 센트짜리 정보가 담긴 페이지들을 클릭하기만 하면 (건당으로 결제할 필요 없이) 합산 결제되는 메카니즘이 자리잡을 것"이라고 예측했죠. 일종의 미터기와 같은 방식으로 유료 콘텐츠 결제가 동작하리라는 셈이었는데요.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서 광고 모델은 빠르게 성장한 반면, 후자는 빌 게이츠의 예측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가 콘텐츠 제공자를 해방시켜줄 거라 예견한 결제 모델, 혹시 잘 떠오르시나요.
1996년 당시 인터넷 사용자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5천만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사용자 수가 100배 이상으로 성장한 지금, 빌 게이츠의 예언은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요.
2020년의 카디 비
잠시 코로나 범유행 시대에 잊지 못할, 인상적인 장면을 얘기해봅시다.
2020년, 카디 비의 WAP은 그야말로 그해의 문제적 콘텐츠였습니다. 미국 음악 역사상 출시 첫 주에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곡이었고, 한해동안 구글에서 사람들이 가사를 가장 많이 검색한 곡이었습니다. 카디 비의 이름이 실린 네번째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 곡이었고요. 무엇보다 유튜브에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지 만 24시간 만에 무려 2600만 회 넘게 재생된 곡이었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 뜻밖에도 카디 비는 온리팬즈(Onlyfans)에 계정을 만듭니다. WAP의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한 지 나흘이 지난 때였죠.
온리팬즈는 자칭 '창작자와 팬의 연결성을 혁신한 소셜 플랫폼'으로 창작자들이 유료 멤버십을 개설해 팬들로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입니다. 주로 성인 엔터테이너와 성노동자들이 유료 구독자들에게 소위 19금 콘텐츠를 공개하거나 판매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요. 카디 비는 온리팬즈 계정을 만들어 월 4.99달러에 WAP의 백스테이지 비디오 같은 콘텐츠를 한정 공개했습니다.
한 카지노 사이트(?)는 카디 비의 월간 온리팬즈 구독 수익이 700만 파운드, 어림잡아 100억 원 이상일 거라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인스타그램 팔로워의 일부를 구독료로 단순히 곱한 추정치라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카디 비로서도 꽤 의미있는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WAP이 유튜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 빌 게이츠가 말한 광고 모델에 가깝다면, 온리팬즈는 후자 모델입니다. 콘텐츠 제공자, 즉 창작자가 콘텐츠를 직접 판매하고자 하는, 후자의 시도들은 인터넷 보급 이래 계속되었지만 대중적인 성공 사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카디 비의 장면 즈음부터는 달랐습니다. 유튜브에 파격적인 뮤직비디오를 올려 광고 수익을 올리는 것 못지않게 그 뮤직비디오의 비하인드 컷을 결제 장벽 뒤에 숨겨두는 것 역시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모두가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2022년의 카디 비는 어디쯤 와있나요. 최근 카디 비는 플레이보이가 온리팬즈를 모방한 카피캣 서비스인 센터폴드(Centerfold)의 커버 걸이 되었습니다. '래퍼'도 '모델'도 '가수'도 아닌 '크리에이터'라는 소개와 함께요.
콘텐츠가 아니라 창작자가
빌 게이츠의 예언이 얼추 들어맞기까지 걸린 시간은 25년 정도입니다. 네, 콘텐츠 제공자가 콘텐츠를 통하되 광고가 아닌 방식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대중적인 방식을 찾는 데 걸린 시간입니다.
빌 게이츠는 전자 결제 기술의 발전이 관건이라고 했습니다. 콘텐츠 소비자 경험 관점에서의 해결책이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빌 게이츠가 제시했던 구독료 모델의 성패는 오히려 콘텐츠 창작자가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페이월을 내걸겠다는 의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콘텐츠 소비자의 용이한 전자 결제 경험이 아니라 콘텐츠 창작자의 풍요로운 수익화 경험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의 선언을 이렇게 고쳐볼까요.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츠 창작자가 왕이라고요. 우리가 지금의 물결을 콘텐츠 이코노미가 아닌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라고 부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의 1996년 칼럼은 아래와 같이 끝맺습니다.
이 문장에서 콘텐츠 대신 창작자를 대입해본다면 우리는 인터넷의 수정된 미래를 비로소 예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호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메일 혀 드림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