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달의 소비1 : 야식 구독료
야식을 시켰다. 배달이 오는 동안 유튜브 구독 목록을 살핀다. 업로드된 콘텐츠를 살피며 야식 메뉴와 어울릴만한 영상을 고른다. ‘야식을 먹는다’고 표현하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보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야식이라는 건 자고로 가장 편한 자리에서 가장 흐트러진 모습으로 현실과 멀어지기 위해 마주하는 것이므로, 하루의 상념을 날려버릴 볼거리를 곁들이는 것은 필수 불가결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야식을 시켜놓고 오로지 ‘음식만’ 먹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유튜브 프리미엄 14,900원, 쿠팡플레이 7,890원, 넷플릭스 5,500원, 구독료 카드 승인 문자가 차례로 들어온다. 다 합치면 28,290원. 구독료로 한 달에 3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쓰는 게 사치인가 싶다가도, 하나를 해지하자니 뭐 하나 쉽게 포기되는 것이 없다. 아직 완결까지 보지 못한 드라마 시리즈와 매주 올라오는 스케치 코미디 채널이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오늘 저녁에 잡혀있는 남편과의 야식 약속이 발목을 붙잡는다. TV보다 OTT인 세상에, 이 정도 소비는 할 만한 것도 같고.
일단 이번 달까지는 구독을 유지해 보기로 한다. 다음 달엔 하나 정도를 해지해볼까 생각한다. 다음 결제일 전에 보던 드라마 정주행을 끝내야겠다. 어쩐지 이번 달에는 야식 먹는 횟수가 늘어날 것만 같다.
2. 덩달아 소비하는 야식 : 무거워도 괜찮아
나는 야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아니,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어느 순간부터 밤늦게 먹는 음식이 소화도 잘 안 되고, 다음 날 아침 컨디션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저녁 이후엔 의도적으로 음식을 피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야식 때문에 배달 앱이 열리는 날이 제법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와이프 때문이다.
보통의 평화로운 밤, 갑자기 와이프의 눈에 초롱초롱한 빛이 들어찬다. 핸드폰을 들고 다가오는 그녀를 보면, 나는 다음에 나올 말을 직감한다. 이내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내밀며 묻는다.
“콜?”
그 순간 와이프의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거절하기 어려운 표정 앞에서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치킨일 수도 있고, 떡볶이가 되거나 육회일 수도 있다. 메뉴는 매번 다르지만, 주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와이프의 눈빛은 늘 행복감으로 반짝인다.
야식이 도착하면 그녀는 진지하게 배달 봉투를 풀고 음식들을 정돈한다. 어느새 서른을 넘긴 직장인이 아니라, 마치 소풍 나온 초등학생 같다. 첫 입을 먹는 순간 그녀의 만족스러운 표정은 마치 세상의 모든 걱정을 잊은 듯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일 아침의 부담은 눈 녹듯 사라지고, 나 역시 입맛이 덩달아 돌기 시작한다.
사실 나에게 야식으로 뭘 먹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와이프가 야식에서 느끼는 그 순수한 기쁨이, 내게는 더 큰 즐거움이다. 물론 다음 날 아침, 컨디션에 별 영향이 없는 와이프와 달리 높은 확률로 내 몸은 평소보다 무겁게 시작한다.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속이 더부룩한 채로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전날 밤 그녀의 반짝이는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그 무거움조차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하루 종일 각자의 위치에서 바쁘게 달리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이 작은 사치가 위안이 된다면, 나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요즘 우리는 배달 앱에서 별표를 해둔 단골집이 몇 군데 생겼다. 와이프가 특히 좋아하는 곳들이다. 예전에는 야식 제안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가끔 내가 먼저 말한다.
“오늘 치킨 각?”
그러면 와이프는 내 의도를 단번에 눈치채고, 빙긋 웃는다.
결국 나는 야식의 맛이 아니라, 와이프의 행복을 함께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에는 저마다 다른 방식의 작은 사치로 이루어지는 ‘소확행’이 존재한다. 우리 부부에게는 가끔 찾아오는 야식 타임이 그 순간이 되었다. 행여나 다음 날 소화제를 꺼내 먹을지라도, 와이프의 초롱초롱한 눈빛 앞에서는 오늘도 기꺼이 배달 앱을 열게 된다.
근데 여보, 육사시미랑 육회가 좀 비싸긴 해도 확실히 속에 부담이 덜 가더라… ^^
3. 이달의 소비2 : 어색해도 괜찮아
그동안 야식을 먹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와이프와 나눈 수많은 야식 타임은 행복했지만 큰 부작용을 낳았다. 옷장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점차 줄기 시작한 것이다. 저번달만 해도 입고 다녔지만 지금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바지를 보며 몸이 보내는 경고를 느꼈다. 작년 한 해 동안 치열하게 미뤄온 러닝이 생각나 다시 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유튜브 속에서, 혹은 출퇴근 길에 마주치는 러너들이 쓰고 있는 고글이 눈에 들어왔다. 고글로 얼굴을 가린 채 러닝에 열중하는 모습이 멋졌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나가 뛰면 되지 고글까지 필요하냐는 와이프의 말에 솔직히 답하기엔 부끄러웠다. 그래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샀다는 말로 내 허영심을 가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안경도 안 쓰는 나에겐, 얼굴에 뭔가를 얹고 뛴다는 것 자체가 꽤나 낯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어 보이기엔 내 몸도, 실력도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고글을 쓰고 며칠간 달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고글의 기능성보다는, 그것이 주는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가면서 야식과의 부담스러운 관계에 하나의 평화로운 합의점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도 뛰고 들어온 나는 “내일도 무조건 나간다”며 고글을 조심스레 닦아 서랍장 위에 두었다.
지난 달엔 가민에서 신형 워치가 나왔단다. 보기만 할꺼다. …정말로.
4. 야식을 소비하는 시간 : 호흡
아기를 낳고, 남편과 보내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퇴근 후에 외식하던 재미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었고, 온전히 둘만 보낸 주말은 힘을 합쳐 아이를 돌보는 날로 변했다. 우리가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잠든 밤에 주어졌다.
아기가 잠들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부엌에 불이 다시 켜진다. 나는 라면을 꺼내 냄비에 물을 올리고, 남편은 그릇을 두 개 꺼낸다. 내가 라면 봉지를 뜯어 끓는 물에 면과 수프를 넣고 계란을 풀 타이밍을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접시에 덜고, 식탁에 수저 두 벌을 가지런히 둔다. 어제 먹다 남은 콜라를 컵에 담아 수저 곁에 올려두고, 그사이 완성된 라면을 식탁으로 옮긴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아기의 잠을 방해할까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서로 오고 가는 말은 없지만, 라면이 식탁 위로 올라가는 순간까지 척척 합이 맞는다. 풀어진 계란이 몽글몽글 맺혀있는 국물 한 모금에 줄임표처럼 걸려 있던 말들이 쏟아진다. “오늘은 유난히 안 자려고 하더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지?”, “고생했어.” 오고 가는 말은 국물처럼 따뜻하고, 온몸 구석구석 배어있는 고단함은 그 따뜻함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속삭이듯 말하고 소리 죽여 웃는 시간. 우리는 야식을 먹으며 서로의 마음을 읽어간다. 우리에게는 매일 야식이 필요하다. 야식이라는 이름의, 짧지만, 충분한 위로의 시간.
5. 습관처럼 소비하는 야식 : 허전한 밤과 더부룩한 아침
밤이 문제였다. 낮 동안 눌러둔 감정들은 조용한 밤이 되면 기어이 고개를 들었다. 담당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느낀 무력감, 직장 동료와의 대화에서 느낀 사소한 서운함, 인기 드라마를 보지 않았으므로 대화에 낄 수 없었던 머쓱함과, 겉모습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상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느낀 억울함 같은 감정은 밤이 되면 하나둘씩 울컥울컥 올라와 허공에 똬리를 틀었다.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은 한꺼번에 밀려들고 허해진 마음은 허기가 되어 돌아온다. 갑자기 출출해지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다. 배달앱을 열고, 이미 여러 번 시킨 익숙한 메뉴를 훑는다.
배달앱이 생기기 이전에 야식을 먹는다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단 가게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지부터 따져야 했다. 냉장고 옆면에 붙어있는 배달 전단의 메뉴가 ‘중식’이나 ‘족발’ 뿐이라면 먼저 근처의 치킨집을 검색하고, 그중에 우리 집까지 배달이 되겠거니, 하는 곳을 찾아내야 했다. 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은 ‘이 밤에, 그렇게까지 먹어야 할 일인가?’를 고민하게 했고 그 고민은 이내 포기로 이어졌다. 고민을 뛰어넘어 야식을 먹어야만 하는 날이라면, 전화를 걸어 원하는 메뉴와 주소를 또박또박 말하는 관문을 거쳐야 했고, 다음에는 배달원을 마주하고, 음식을 건네받고,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일을 거쳐야 했다. 현금결제가 아니라면 휴대용 카드리더기에 카드를 긁고 작은 영수증이 나올 때까지 뻘쭘하게 서 있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야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고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이 야식이었다.
모든 수고는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대체되었다.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주문은 끝이 났다. 요청 사항에 ‘벨 누르지 마시고, 문 앞에 두고 문자 주세요’까지 입력한다면 완벽에 가까워진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누군가와 대면하지 않고도 음식은 집 앞에 도착했다. 야식은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으로 나의 공허하고 무기력한 밤을 채웠다. 배달앱이 스마트폰 배경화면 한구석에 위치한 뒤로,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야식을 먹는 일로 바뀌었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은 도파민이 되어 한밤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정도의 보상쯤은 괜찮다’고 시작한 야식 배달은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야’로 이어졌지만 지켜진 적은 없었다. 운동복을 챙겨입고 헬스장을 가는 일보다 야식을 주문하는 일이 훨씬 쉽고 간단했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먹는 행위는 중독처럼 빠르게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침마다 퉁퉁 부은 얼굴, 늘어난 뱃살을 마주한다. 나를 위한 보상이라 설득한 어젯밤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편리함으로 갈망하는 보상은 아침에도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을 안긴다. 야식이 문젠지, 배달앱이 문젠지 알 수 없는 아침. 더부룩한 속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6. 야식으로 소비하는 치킨 : 좋아서 그래
난 어렸을 때부터 치킨을 참 좋아했다. 패스트푸드 혹은 정크푸드로 묶이는 햄버거, 피자보다 치킨은 내 삶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버지가 월급날 치킨을 사오던 세대도 아니고,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좋다. 바삭한 껍질과 윤기 도는 속살, 그리고 양념의 무한한 변주까지. 치킨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는 스스로 사 먹는 어른이 되었을 때 까지도 여전히 맛있다.
스스로 사먹을 수 있어 예전만큼 간절하지 않지만, 유독 유혹에 약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치킨 냄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마치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처럼, 기억과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어떤 치킨일까’를 생각하며 층수를 올라간다. 문제는 그 잔향이다. 집에 들어와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유혹을 이겨내려 애써보지만, 패배가 정해진 치킨게임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먹기로는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이 났고, 이제 남은 문제는 무슨 치킨이냐는 것. 아까 맡았던 냄새를 따라가도 되지만, 내면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해본다. 바삭한 게 당기는 날도, 단짠단짠한 맛이 당길 때도 있다. 아니면 소스를 잔뜩 묻힌 다리를 뜯고 싶은 날도 있고. 그날그날 입맛은 달라도, 결국 손이 가는 건 늘 실패 없는 메뉴들 중 하나다. 필자에게 있어 정답에 가까운 치킨 3대장. 역시 돌고 돌아 클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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