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록 vol.9 : 산책

메모리브 매거진, 소비록 2025년 11월호 vol.9

2025.12.01 | 조회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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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브 매거진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룹니다.

안녕하세요! 메모리브 매거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 계절, 여러분의 가을은 어떤 모습인가요? 소비록 2025년 11월호의 테마는 '산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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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볍게 소비하는 산책: 걷는 사이에

 나는 대학교 새내기, 그 오빠는 2학년이었다. 그는 나에게 산책 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도, 축제 뒤풀이 때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도, 수업이 끝나 강의실 밖을 나갈 때도 늘 조용히 옆으로 와서 같이 산책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산책이라는 단어에는 얹히는 부담이 없었다. 밥을 먹으러 가자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제안은 가볍지가 않았다. 아무리 학교 근처라 해도, 메뉴를 정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보내야만 하는 기본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고, 더군다나 한 푼이 아쉬운 대학생에게 돈 쓰는 일은, 그게 설령 내가 쓰는 돈이 아니라 할지라도 흔쾌히 승낙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산책은 좀 달랐다. 기본적으로 시간에 구애가 없었고, 돈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걸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산뜻한 제안을 좋아했다. 한 학기를 보내며 나는 그와 산책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과 친구와 선배들은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나와 그의 관계는 한 학기 내내 같은 과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발전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같이 걷고, 걸으면서 남들보다 조금 이야기를 더 나누는 그런 정도였다.

 2학기 중간고사 시험 기간, 나는 거의 매일 저녁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다. 1학기 때 엉망진창이었던 학점을 어떻게든 올려보고자 했던 마음이 컸다. 그와는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다. 내가 공부하고 있으면 그가 와서 인사를 하거나, 내가 자주 앉는 자리로 가면 그가 이미 앉아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시험 기간 내내 그와 나는 도서관에 있었고, 그래서 산책을 했다. 어떤 날은 짧았고, 어떤 날은 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은 날도, 비교적 많은 대화를 나눈 날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학과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동기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는 자리로 돌아와 후회한 적도 있지만, 내 얘기가 남에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약간은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었고, 그가 종종 들려주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얘기는 늘 흥미로웠다. 공유하는 취향이 늘어가면서 나를 너무 많이 드러내는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염려도 있었지만, 어쨌든 산책 중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유쾌했고, 함께하는 산책은 즐거웠다.

 나는 그보다 시험이 하루 빨리 끝났다. 그러니까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마지막 날이고, 그는 아 내일은 혼자겠네라고 했던 날. 그날, 그는 먼저 집에 가보겠다는 나를 따라 나와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아 그냥 산책이나 좀 할 겸이라고 덧붙였다. 산책이 주는 가벼움 앞에서 굳이 사양하는 모양새도 멋쩍어 나는 그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교문까지 가는 길 중 가장 먼 길을 택해 걸었고, 얼마 가지 않아 어딘가에서 라디오헤드의 creep이 어렴풋이 들렸다. 음악은 2, 창문을 열어둔 밴드부 동아리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럼이 가끔 엇박으로 튀었지만 제법 들을 만한 연주였다. 그와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로등 불 아래 벤치에 앉아 그 연주를 들었다. 8시가 넘은 가을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그는 내일도 산책하러 만나자고 말하며 손을 잡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와 함께한 숱한 산책들을 떠올렸다. 그저 가볍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우리의 지난 산책들을.


2. 구실로 소비하는 산책 : 함정 카드

 야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 늦어진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저녁을 먹기엔 애매하고 운동을 하자니 배고픈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늦게 먹으면 괜히 살만 찌니 운동 삼아 가볍게 산책하며 저녁을 건너뛰기도 한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조금 움직이는 편이 허기를 잊기에도 좋다. 와이프와 함께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걷는 즐거움도 있다.

 그런데 가끔, 타이밍이 좋게(?) 아파트 단지에 혹은 인근 공원 근처에 작은 야시장과 만날 때가 있다.

 위험하다.

 들어서면 안 되는 그 길 위엔 기름 냄새와 음악 소리가 깔려 있다. 푸드트럭에서 튀겨지는 치킨, 바람에 섞여 오는 닭꼬치 냄새,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 지난 노래들. 운동은 명분이고, 허기를 달랠 목적이었는데, 도리어 걸음을 옮길수록 허기가 깨어나 마음을 흔든다. 더구나 짧은 봄이나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이 시즌 한정 이벤트 아닌가. 그냥 지나치는 건 너무 각박하다는 와이프의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운을 띄워본다.

 “잠깐 구경만 하자.”

 항상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올 때면 손엔 늘 포장봉투가 들려 있다. 닭꼬치, 야채 곱창, 츄러스. ‘걸었으니까 괜찮다는 빈약한 합리화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산책은 끝났고, 어쩌다 보니 산책은 허울 좋은 핑계가 되었지만 기분은 좋다.

 내일도 산책을 나가야겠다.


3. 이달의 소비1: 선으로 이어진 노래

 직장인들의 데이트 묘미는 평일 저녁에 있다. 회사에서 다 지쳐버린 심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옮기는 발걸음과, 약속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리는 그 마음이이 은근히 활기를 돋는달까. 평일 저녁 데이트라면 코스가 뻔하다. 저녁 먹고 카페에 잠깐 들르거나, 날씨가 좋은 날에는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좀 하는 것. 다음날 출근을 위해 무리할 순 없고, 같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 손을 잡고 느긋느긋 걷는 것. 불타오르는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는 서투름도, 너무 익숙해져 느끼는 권태로움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지점, 그것이 다 큰 어른들이 즐기는 퇴근 후의 뻔한 데이트랄까.

 지금이야 블루투스 이어폰이 기본값인 시대지만, 내가 남편과 연애할 때만 해도 블루투스 이어폰은 신문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콩나물 대가리 같은 블루투스 이어폰의 디자인을 운운하며 호불호가 갈렸고, 이어폰에 굳이 큰돈을 써야 하나 의문을 가지던 때였으니. 더군다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나 같은 사람에게 블루투스 이어폰이란 먼 나라 얘기였다. 나와 비슷한 남편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퇴근 후에 만나 저녁을 먹고 한강을 걸었다. 직장인의 뻔한 데이트 코스였다. 꽤 걸었다 싶으면 보이는 아무 벤치에나 앉아서 유선 이어폰을 연결해 노래를 들었다. 나는 왼쪽, 남편은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토이, 김동률,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었다. 나눠 낀 이어폰이 빠질까 우리는 달싹 붙어 앉았다. 양쪽을 연결한 이어폰의 줄이 팽팽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어깨를 붙여 손을 잡았고, 줄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얼마 전, 퇴근 후에 남편과 데이트를 나갔다. 연인이 아닌 부부에게 퇴근 후 저녁 시간이라는 것은 달콤한 것만을 골라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므로, 부부가 된 후 평일 저녁 데이트란 특별한 이벤트 쪽에 속했다. 오랜만에 밖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산책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평일에 부리는 사치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가방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꽂았다. 걸음을 멈추고 앉을 필요는 없었다. 한 쪽씩 나눠 끼고 팔을 저어 휘휘 걸으며 우리는 여전히 토이와 김동률,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었다. 괜한 움직임에 상대 이어폰이 빠지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은 연인에서 부부가 된 편안함만큼 풀어졌다. 걷다 마주한 자전거에 우리는 양쪽으로 떨어져 길을 내주었다. 선 없이도 연결된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 자전거가 지나가고 남편과 다시 붙어 서면서, 문득 유선 이어폰이 그리웠다. 둘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던 그 이어폰이.

 집에 돌아와 서랍 깊숙이 넣어둔 유선 이어폰을 찾았다. 핸드폰에 연결하려고 보니, 더 이상 연결할 수 없는 8핀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는 동안 이제 더 이상 못 쓰는 이어폰이 된 줄도 몰랐다. 누렇게 변한 줄이 괜히 짠하다. C타입 유선 이어폰을 검색하다가, 산다고 얼마나 쓰겠어, 구매하기를 누르려는 마음이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남편에게 물어나 볼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8핀 이어폰을 들고 거실로 나가서 말을 건넨다.

 이번 주말에, 한강으로 산책이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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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달의 소비2: 튜닝의 끝은 순정

 러닝이 취미가 되면서 운동화를 네 켤레 샀다. 쿠션화 둘에 경량화, 대회용 레이스화까지. 워치에 기능성 양말, 옷 등도 빼곡히 샀다. 관련 용품을 사면서 리뷰를 몇 개나 찾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이든 취미든, 나는 항상 장비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갔을 때, 신발장에서 오래된 운동화를 하나 발견했다.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내가 엄마한테 선물해 드린 러닝화였다. 색이 바래고 밑창은 다 닳았는데, 여전히 깔끔했다. 한 켤레만 신으셨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원래 걷는 걸 좋아하신다. 매일 오후엔 근처 산책로를 따라 운동을 다녀오시고, 주말이면 거리를 더 늘려 한참이나 걸으신다. 이렇게 낡은 신발로 계속 걷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을 좀 더 써서 골랐다. 매일 운동하는 엄마가 비 오는 날에도, 다음 날에도 뽀송하게 신을 수 있도록 고어텍스 트래킹화를 선물해 드렸다.

 엄마는 신발이 있는데 뭘 또 사왔냐고 하시면서 택을 먼저 뜯으셨다.

 “이건 어디 갈 때 신어야 하나? 등산 갈때?” 하시며 좋아하신다.

 나는 대답했다.

 “그냥, 뭐 걸을 때 신으면 되지. 방수도 되고.”

 “그래? 근데 요새는 신발을 잘 안 신어서.”

 “?”

 “맨발로 걸어야 건강에 좋다잖아. 너도 맨발 걷기 좀 해봐라.”

 그날 저녁,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황톳길 위에서 맨발로 찍은 발 사진이었다. 요즘 엄마 취미는맨발 걷기였다.

 그래맨발 걷기 장소까지는 안전하게 가실 테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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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취미로 소비하는 산책: 산책과 러닝 사이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운동도 좋아한다. 하지만 나에게 운동과 산책은 다른 영역이었다. '운동'하면 뭔가 목표가 있어야 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오래. '산책'은 달랐다. 아무 준비 없이 나가서 바람 쐬는 가벼운 활동. 기분 전환 정도의 느낌.

 산책 삼아 나간 공원에서 문득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속도가 저마다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 걸음이 느린 편이라, 나도 조금 빨리 걸어볼까? 하는 생각에 빠르게 걸어봤다. 호흡이 약간 흐트러졌을 때, 기분이 괜찮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엔 왠지 모를 낯선 즐거움이 있었다. 늘 보던 벤치, 가로수, 산책로의 굴곡들이 다른 속도로 펼쳐지니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빨리 걷다보니 가벼운 조깅으로 이어졌다. 산책으로 시작했지만 운동으로 마무리가 되었던 날. 그날 이후 조금씩 달라졌다. 산책을 조금 더 일찍 나서게 됐고,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3km5km가 되고, 운동화가 바뀌고, 옷도 달라졌다. 준비 없이 나가던 산책엔 점점 준비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젠 산책 삼아 러닝을 나간다. 집 근처에서, 도심 속에서, 여행지에서. 어디서나 달릴 수 있는 길들이 눈앞에 있다. 10km가 익숙해지자 당연히 욕심이 생겼다. 남들처럼 더 빠르게, 더 멀리.

 그렇게 러닝이 산책과 운동의 경계에 있던 시기의 어느 날이었다. 집앞 공원을 뛰던 중에도 계속 시계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이스가 느린가? 오늘 심박은 왜 이렇게 높지? 케이던스는 유지가 되고 있나? 숫자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해 질 녘에 나가서 어둠 속에 들어왔지만, 노을을 본 기억이 없었다. 주객이 전도된 러닝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었다. 워치 기록은 좋았는데 기분은 별로였다. 아차 싶었다. 그 뒤론 시계를 보며 조바심이 들 때마다 고개를 들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산책을 나온 거라고.

 내년2, 오사카로 42.195km짜리 산책을 떠날 기회를 얻었다. 당첨 메일을 열었을 땐 신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42.195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이 크다. 그래도 나만의 산책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대회장의 열기, 낯선 도시의 풍경, 그 곳의 공기를 마시며. 그날의 산책이 벌써 기대된다.


6. 익숙함을 소비하는 산책 : 유예의 풍경

 성인이 되어 일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6년 차 무렵부터, 나는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과연 즐거울 수 있는 영역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재미라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으나, 나에게 회사에서 느끼는 재미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직접 해낼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재미였다. 상상으로만 꿈꾸던 그 을 직접 내 머리와 손을 거쳐 현실로 만들어내는 기쁨.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재미의 세 번째 의미. ‘좋은 성과나 보람그에 적합한 감정이었다. 물론 옆자리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웃게 만들고 울게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었고. 나를 지탱해 주던 진짜 재미는 일을 통해 느끼는 성과, 만족감,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재미도 6년 차에 접어들면서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을 대하는 내 태도는 권태로웠고,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일상을 덮었다. 익숙해져 이골이 난 일에 새로운 재미랄게 없었고, 회사 생활은 더 이상 재미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회사에 있는 8시간 중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의무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공적인 시간. 나는 매일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르는 것은 일종의 루틴처럼 정해진 코스였다. 커피 한 잔 들고 정오쯤의 햇볕을 쬐며 회사 주변을 걸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따라서 하던 그 산책이, 회사에 재미가 떨어질 무렵부터 꽤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딱히 새로울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일 생각은 좀 하지 말자, 마음먹으니 보이는 게 많아졌다. 회사 근처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6년 만에 회사 직원이 종종 사다 주던 쿠키 집의 위치를 알게 됐다. 아직도 여기를 몰랐냐는 동료의 타박은 덤으로 따라왔다. 매일 회사 주변을 샅샅이 산책하며 나는 회사 동네를 알아갔다. ‘회사 동네라니. 심적으로 가까워지기 힘든 회사와 정겨움의 대명사 격인 동네를 나란히 같이 쓰는 것이 어쩐지 이질적이었지만, 매일 같이 걷는 산책길이 회사 주변인 것보다는 회사 동네인 편이 더 나았다.

 회사 동네를 산책하면서 옆 건물 화단에 핀 꽃은 건물 주인이 아니라 근처 사는 할머니가 심어둔 것이라는 사실을, 회사 건물 뒤에는 까만색 고양이가 다니는 후미진 작은 공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라던가, 몇 년을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카페가 세 군데는 된다던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작은 떡집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다는 것들 따위를 새로 알았다. 점심시간에도 밀린 업무를 위해 적당히 걷다 들어갔던 때에는 몰랐던 것들. 나는 일과의 권태기를 끝내기 위해 일과 헤어져야 할지, 관계 개선을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한동안 점심 산책을 길게 이어갔다.

 산책이 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일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매일 같은 길을 6년이나 걸었지만, 이제야 처음 본 장면들이 있는 것처럼, 이제는 흥미가 다 떨어져 버린 일에도 어쩌면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얼굴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산책이 내게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 것처럼, 6년 동안 부대끼며 지지고 볶아온 일에도 어딘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장면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있다면 어딘가에 다시 시작할만한 재미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나는 나의 재미였던 그 과 다시 잘 지내보기로 했다. 그래도 영 재미가 없으면, 그때는 쿨하게 보내주자고 마음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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