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허영으로 소비하는 책: 돈으로 읽는 책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점심시간마다 새로운 책을 고르는 일이 그 시절 내게는 유일한 흥미이자 이벤트였다. 어디를 가든 책을 들고 다녔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문학소녀'라 불렀다. 장난이 더 많이 섞인 우스갯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독서는 내게 순수한 즐거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책 읽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나름의 자부심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고등학생 수준에서 독서라는 것은 음악감상보다는 고차원적인 취미 같았으니까. 대학에 가서도 도서관을 찾는 일은 여전히 재미였지만, 그 재미에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부수적으로 덧입히는 만족감도 있었다. 좋아하는 오빠가 '너는 책을 많이 읽네'하며 말을 걸어주었을 때는, 독서가 마치 '나'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에 따라오는 '책 읽는 사람'의 이미지가 내 독서 생활에 큰 동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전문 서적과 두꺼운 이론서를 반복해서 읽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매일 책과 씨름했고, 그 속에서 독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이론서에 밀려 재미로 읽던 책과도 점점 멀어졌다. 독서가 특별하지 않은 세상에서, 굳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하나. 취직하고서는 책도, 도서관도 영영 떠나보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된 나에게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 물을 때마다 나는 '독서'라고 답했다. 책과 멀어졌지만, 그 '고차원적인 취미'를 나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 '요즘 재밌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 물으면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나는 늘 내가 독서를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독서와 멀어졌지만, 시간이 나면 서점에 들러서 책을 샀다. 읽는 건 나중 문제고, 관심 가는 책이 있으면 두어 장 훑어보고 일단 사서 책장에 꽂았다. 읽진 않았으나 언젠가 읽을 것이라는 합리화로 책장에 책을 채웠다. 늘어가는 책을 바라보면서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 세계와 이별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꾸준히 돈을 들여 책을 사 꽂았다. 어릴 적, 책을 사고 싶다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지갑을 열어주던 아빠를 떠올리면서, 책을 살 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돈을 썼다.
휴일 아침, 소파에 누워 알라딘 앱을 연다. 메인 화면에 뜨는 '편집장의 선택'을 눌러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독서를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이번에도 읽는 대신 샀다.
2. 읽기 위해 소비하는 수고 : 서점과 도서관 사이
카페에 가서 김이 새는 경우가 있다. 아니, 맥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 지인과 밥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메뉴를 고르는 타이밍에 누군가 '오늘은 내가 살게'를 외치는 순간이 그렇다. 평소에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가끔 '비싸고 달달한 음료'가 땡기는 날이 있다. 비싸고 달달한 음료가 땡기는 그런 날, 하필 누군가 선심을 쓰겠다고 나서면 그 비싸고 달달한 음료를 먹으려 했던 기대감이 확 꺾이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냥 마시려고 했던 거 이야기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매번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누군가 사준다고 비싸고 달달한 음료를 골라버리는 모양새는 영 찝찝해서 내키지가 않는다. 나는 누가 사주니까 이때다! 싶어 비싼거 고르는 사람은 아니니까.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막상 펼치기까진 많은 다짐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선뜻 책을 사진 않는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도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책과 소개 글을 보고 구미가 당긴 책들을 만나러 가는 곳은 서점이 아닌 도서관이 먼저다. 실제로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 중 상당수는, 처음엔 도서관에서 만났던 것들이다.
책을 읽기 위해 사는데, 사면 오히려 읽기 어렵다. 직접 산 책은 어딘가 조심스럽다. 쫙쫙 펼쳐 읽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깨끗하게 아껴 쓰는 습관이, 책 앞에서도 그대로 작동하는 탓이다. 그래서 오히려 내 책은 덜 읽힌다. 묘한 모순이다. 결국 진짜로 읽고 싶은 책은 우선 빌린다. 메모도 못 하고,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읽기’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도서관 책은 펼침을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종이의 결을 따라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도 마음에 남으면 그때야 책을 산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지만, 내가 감명 깊게 읽은 흔적을 물리적으로 남겨둔다.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혹은 오히려 처음처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함께.
꼭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도서관 책의 허름함은 나에겐 잘 닦인 도로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먼저 지나간 페이지 위에서 나만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괜찮은 독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에겐, 책을 읽고 싶은 날과 사는 날이 다르다.
3. 취향대로 소비하는 독서 : 편식하는 독자입니다.
독서에 편식이 심한 편이다. 아무리 재밌고 유익하다고 해도 장르 소설이나 자기계발서에는 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나는 여행을 가도 새로운 체험보다는 그곳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한 타입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감각형 인간이므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다룬 판타지 소설과는 좀처럼 가까워질 수가 없다. 자기계발서도 비슷한 맥락인데, 가장 큰 배움은 직접 부딪치며 얻는 것이라고 믿는 내게, 남의 성공담은 그다지 깊은 울림을 주지 않는다. 편협하다면 할 말 없지만, 어찌 됐든 내 독서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게 사실이다.
나는 오랫동안 소설을 읽어왔다. 늘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한 나에게 현실을 반영해 삶을 묘사하는 소설은 딱 맞는 장르였다.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에 정말 이런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은 한없이 포근한 위로가 됐다. 어떤 캐릭터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닮았고, 어떤 캐릭터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는 나에게 '나도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소설을 읽었다. 최근에는 에세이로 눈을 돌리게 됐는데, 가상이 아닌, 현실을 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꽤 흥미가 있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개인의 심사(心思)나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는 얘기' 듣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장르기도 하다.
언젠가 사람 사는 얘기에 지치고 상상력이 간절해지는 날이 오면, 판타지 소설도 좀 재밌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분간은 판타지도 자기계발서도 여전히 어렵지 않을까 싶다.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마음이 가장 편해진다는 걸 아니까. 이 편식은,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되지 않을까.
4. 입문을 위해 소비하는 책: 정보의 바다 속, 책으로 쌓은 등대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나는 책을 먼저 찾는 편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 속도만큼 정보가 산만하게 흩어진다. 반면 책은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다듬어 놓은 길처럼, 천천히 따라가며 배우기 좋다.
옷에 관심이 깊어졌을 때도 그랬다. 단순히 ‘예쁘다’에서 끝내긴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특성상 역사와 맥락, 즉 ‘근본’을 알고 싶었다. 온라인 글과 영상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몇 권의 패션 서적이 대신 메워줬다. 러닝을 시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수많은 코치와 러너들이 쌓아온 경험들이 나를 인도했다. 자극적이고 줄 세우기식의 정보가 판을 치는 온라인상 정보와 달리, 책 속에서는 한 사람의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 있어 흐름을 따라가기 편했다.
새로운 취미로 입문하기 위한 책 소비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내가 하려는 일에 마음을 단단히 다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얇은 종이 위에 누군가 쌓아둔 시간과 노하우를 천천히 받아들이며, 나도 조금씩 그 세계로 들어간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지만, 프로가 된 듯하다.
물론 인터넷은 여전히 빠르고 편리하다. 사이즈 추천이나 가격 비교 같은 건 역시 온라인이 최고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일 때, 정제된 한 권의 책이 훨씬 든든한 길잡이가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차근차근 쌓이는 이해와 감각이 내 취미를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아…! 교과서를 이렇게 읽었더라면….
5. 이달의 소비1: 그냥 뛴다고?! <다니엘스의 러닝 포뮬러>
무언가 추천하려고 하면 괜히 망설이게 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라면 더 조심스럽다. 내가 좋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런데도 이번 달에 산 『다니엘스의 러닝 포뮬러』는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러너들 사이에선 이미 ‘바이블’로 불리는 책으로, 나에게도 달리기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나는 성격상 무언가를 시작하면 그 분야를 공부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열심히 달리면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이틀이 한 달 두 달이 되면서 막연한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유튜브와 커뮤니티를 뒤져보며 정보를 찾다가 결국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책에선 저자인 다니엘스가 정립한 VDOT를 활용하여 자신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 필요한 훈련 방향, 그리고 예측 기록까지 수치로 보여준다. 이 책은 고된 훈련이 아닌 최소한의 달리기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장거리 러닝에 템포를 섞는 법, 주간 거리 대비 장거리 비율을 어떻게 잡아야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지 등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많다. 효율을 중시하는 성격상 이런 원리를 이해하니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가 확실해져 러닝이 훨씬 즐거워졌다. 예전에는 그냥 힘들게 달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몸에 맞는 속도와 거리로 효율적인 훈련이 가능해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러닝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니라, 러너로서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그냥 뛰던 내가 준비된 러너가 되어가는 과정을 만들어줬다.
혹시 달리기를 막 시작했거나, 꾸준히 하고 있는데 제자리걸음이라고 느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떻게 달려야 할지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러닝은 힘든 운동이 아닌 한층 더 재밌는 취미가 될 것이다.
6. 이달의 소비2 : 나도 그 농담에 끼어들고 싶어 <술과 농담>
내 몸은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잘 분해하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진다는 뜻이다. 빨개지는 건 얼굴뿐만이 아니다. 팔과 다리, 손과 발, 귀까지 온몸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다. 그렇다고해서 술이 싫은 건 아니다. 나는 술이 좋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마실 때의 분위기가 좋다.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몸이라는 걸 체감한 뒤로, 술은 나에게 닿을 수 없는 동경 같은 대상이 되었다. 젊을 땐 친구들과 어울려 마시는 술을 남들처럼 거하게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쉬웠고, 나이가 들고 나서는 '적당히 기분 좋아지는 술기운'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술만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차오르며, 심장은 분주히 뛰기 시작한다. 그런 몸을 가진 나로서는, 술 마시는 사람들이 느끼는 그 알딸딸한 흥취를 알 길이 없다. 술기운에 살짝 고조된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 오고 가는 농담 속에서 터지는 호탕한 웃음. 그런 분위기에 나도 스며들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술과 농담,
제목부터 술 마시는 이들의 낭만이 배어 있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농담이란, 실없기도 하지만 농을 가장한 진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듣는 맛이 있다. 술기운에 조금 느슨해진 마음은 농담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허용적인 분위기, 말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순간들. 내가 좋아하는 술자리의 공기가 이 제목에 녹아있다. '말들의 흐름' 시리즈 일곱 번째 책, <술과 농담>. 책 소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은 당신을 초대했고, 술을 빌려 말함으로써, 녹록지 않은 당신의 일상에서 숭고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에게 아무렇지 않은 농담을 건넨다. <술과 농담>은 만취의 거드름보다,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독주를 홀짝이는 혼술에 가깝다. 여섯 종류의 술이 있고, 술의 주변에는 '더 취한자'가 있고 '덜 취한 자'가 머무른다."
술에 대한 사유와 경험, 일상의 이야기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낮술이라도 한 잔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정작 낮술이라도 한 잔 들이키는 날에는 빨개지는 얼굴을 숨기느라 후회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농담에는 역시 술이지, 커피였으면 재미는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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