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

<엄마>에 대하여, 금요지기 수염왕이 쓰다

2024.03.29 | 조회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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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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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도리, 엄마는 우리 딸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보니 내 방 침대 옆 테이블에 엄마가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에는 엄마가 그동안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 나는 엄마처럼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엄마는 내가 타로와 결혼하면 힘들어 질 거라고 생각한 걸까.

 처음에는 엄마도 타로를 좋아했다. 타로의 행동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씨를 엄마도 느꼈을거다. 그러다 타로의 어머님이 쓰러지고 나서, 어머님의 불편해진 몸을 타로가 돌봐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우리의 만남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불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타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내가 나눠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타로의 눈에는 어느새 슬픔이 그 안을 메웠고 나는 그런 눈을 볼 때마다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타로를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타로를 사랑하니까. 나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사랑한다면 힘들 때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니까.


 대학교 1년 후배였던 히로시는 교토에서 잘 나가는 렌터카 회사 사장의 외동아들이다. 대학 시절 그가 내게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린 후배가 고백했다는 게 조금 황당하기도 했고 그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와 그에 관한 이런저런 불편한 소문들로 고백을 거절했었다. 물론 이런 거절 이유들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졸업 후 처음 그를 다시 만난 건 지난 겨울, 내가 일하는 회사로 영업을 나온 히로시를 우연히 만났고 그날 저녁이나 먹자는 말에 나는 응했다. 히로시는 회사의 사장인 어머님께 사업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히로시는 내게 사귀는 사람이 있냐 물었고 나는 잔인하게도 타로를 숨겼다.

 엄마에게 히로시 이야기를 하니,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타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둡고 불안한 표정만 지었었는데 이번에는 뭐가 그리 기쁜지, 엄마는 신이 나서 히로시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런 엄마 때문이었을까. 나는 히로시와의 만남을 계속 이어갔고 몇 번의 만남 뒤에 고백까지 받아주게 되었다.

 나는 타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의 어려움을 나눠 감당할 용기가 없던 걸까. 우리 둘이 함께 보낸 시간들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수많은 생각들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져, 점차 하늘에 뿌려진 연기처럼 옅어지고 흐려지고 사라지고 있다. 결국 엄마의 뜻대로. 내가 힘들지 않기 위해. 나는 조용히 타로가 사준 초록색 구두를 신발장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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