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어느 골목길에 서서

<기억의 장소>에 대하여, 월요지기 용PD가 쓰다

2024.04.01 | 조회 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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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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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동에서 가리봉동을 지나 남구로역,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어지는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눈치 보이는 동네다. 이곳을 한 번 방문하려면 자그마치 세 번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첫째는 중국인들의 눈치다. 한국인들보다 높은 비율로 이 동네 골목골목을 점유하고 있는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현지인’이었다. 한데 이방인이 되어버린 심정을 한 골목만 꺾어보면 알 수 있더라는 이야기다. 자칫 ‘가리봉 현지인’들이 나를 ‘수상한 이방인’으로 인식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자꾸만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둘째는 한국인들이다. 이미 한국인들은 이 동네에서 마주치는 남성들의 이름을 ‘장첸’과 ‘강해상’으로 암기하고 있는 탓이다. 이곳을 활보하는 내 모습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갔어? 겁도 없니?” 핀잔을 듣기에 딱 좋다. 어쩌면 핀잔으로 끝나는 경우가 다행일 수도 있다. 저 사람 알고보니 조선족이라더라, 해괴한 풍문이라도 돌기 시작하면 기피 대상으로 찍혀버릴 테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이게 그러니까 첫째와 둘째랑은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이 동네를 다녀오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눈치라는 사실이다. 한껏 주변을 살피며 일대를 주파해보면 아마도 무척 높은 확률로 아무런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 심지어 잘 생각해보면 첫째와 둘째에서도 사람들은, 한국인이건 중국인이건 내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자각이 피어난다. 그리하여 셋째로 스스로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얘기다. 나 자신이 지금 떳떳한가? 누구의 시선도 구애받지 않고 이 길을 걸어도 되는가? 내가 나에게만 눈치를 주지 않으면 괜찮다. 맘대로 하라지 뭐. 무관심한 듯 지나가며 ‘저 사람의 앞길에도 험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기를’ 정도의 응원만 덧붙이면 될 일이다.


 이 일대가 마무리되는 지점, 즉 남구로역을 지나 구로디지털단지로 진입하는 초입에 위치한 지식산업센터에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PD로 일하는 사람에게 스튜디오는 곧 사무직 회사원들의 사무실에 해당한다. 2년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촬영과 편집을 하고, 기타 사무도 보고, 밥도 많이 먹었고 술도 많이 마신 다목적 공간이다. 사무실이라며, 술을 마시는 건 뭐냐고?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 자유로움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규율이 꽉 잡힌 공간에서 무슨 창작이 되겠느냔 말이다. 마감을 3시간 남긴 촉박한 시점에 냉장고로 가서 ‘지금부터 마무리를 기가 막히게 맺으려면 어떤 막걸리로 뇌세포를 활성화해야 할까’라는 고민에 빠져들 줄 아는 호연지기. 그것이야말로 우리 스튜디오의 자랑이라 할 만했다.

 생각건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허풍이 가능했던 이유는 ‘골목길’에 있다. 우리 스튜디오가 어엿한 큰길에 있었더라면, 이를테면 테헤란로 복판에서 고개를 들면 바로 찾을 수 있는 고층빌딩 같은 곳이었다면 호연지기가 피어날 리 없었으리라는 이야기다. 큰길에서는 공간의 규율을 내가 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더 많은 목적들이 교차하는 틈바구니에서는 세상의 규율을 따라야만 한다. 더 많은 고객들이 찾아올 테니 더 높은 임대료가 책정되고,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다고 알려진 이론에 따라 업무환경이 결정된다. 개인카페보다는 스타벅스가, 수제버거보다는 버거킹이 어울리도록 강제된다. 큰길이니까.

 4명이서 단촐하게 일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골목길 서사를 만들어갔다. 일하다 말고 막걸리를 홀짝여도 괜찮았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붙인 뒤 일하겠다 해도 무방한 규율 아래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회사에서 일하면 커리어가 위험하지 않아? 겁도 없니?’ 걱정 섞인 핀잔들은 가볍게 물리쳤다. 이 공간에서는 그래도 괜찮다는 게 우리의 룰이야. 왜 큰길의 규범을 자꾸 들먹이려는 건데? 큰길을 거부하던 나의 답변은 과연 우리 골목의 고즈넉한 정취를 지키겠다는 투쟁이었을까. 좁다란 골목에 시야가 갇혀버린 나머지 세상 전체에서는 우리 골목이 소외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본질적 이방인의 신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시간은 거짓말처럼 흘러 스튜디오는 문을 닫고, 나는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이라고 마땅히 큰길에 서 있지는 않은 듯하나, 새로운 길목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어느 길목으로 깊이 들어가볼지 가늠할 차례다. 나는 진실로 떳떳한가? 누구의 시선도 구애받지 않고 다음 길로 접어들면 되는가? 일단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험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정도의 응원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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