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기억의 배반>에 대하여, 월요지기 용PD가 쓰다

2024.03.18 | 조회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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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건 딱히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여섯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쪽은 나였고, 삼십에서 사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도 나였기는 하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놀고 있을 거라던가, 그 아이들 각자에게 이십 년 전의 우리 모습을 대입해 보아야겠다는 예상을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나를 따라 일찍 온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기 시작했다. 쟤네들 꼭 우리 같지 않아?

 때로 새침한 낯빛을 띄우는 저 소녀는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성희 같은 역할이겠네. 힘이 가장 센 쪽은 아무래도 저기 저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겠지. 그래도 순해 보이는 인상이라 친구들에게 주먹 자랑을 하지는 않을 듯하구나. 정환이가 꼭 저랬었어. 아니, 쟤는 뭐야. 딱 보니까 쟤가 쟤를 좋아하네. 민규가 은지를 저렇게 쫓아 다녔잖아. 그리고 가장 조그마한 저 꼬마는 아마도 윤철이⋯ 달리기가 제일 빨라 보이는 저기 저 까무잡잡한 소년은 정원이겠구나⋯⋯. 그렇다면 저 중에서 나도 있을까. 나는 어떤 캐릭터였냐고? 저 무리의 일원들 중에서 무리 자체를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로 지목할 셈이다. ‘우리는 최고의 친구들이야’라는 자부심이 꽉 찬 아이. 우리의 관계야말로 세상의 여느 친구들이 비할 바 없는 우정이라고 으스댈 게 뻔한 허풍선.

 허풍이 드는 계기는 반장 선거였다고 기억한다. 전학을 오자마자 1주일 만에 마흔 명 아이들 중 과반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독특한 경험이었다. 정계 데뷔무대가 대통령 선거였던 아무개의 심정이 무릇 비슷했을까. 교단에 서서 공약을 발표하던 그 시점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제게 어떤 특출난 재주는 없지만,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모든 힘을 다해 봉사하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얘기를 짤막하게 내놓았다. 내 성대에서 울려나간 언어보다 훨씬 단단하게 기억에 자리잡은 건, 반대로 망막으로 들어와 맺힌 몇 개의 형상들이다. 올~ 탄성과 함께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시선과,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단 한 명 어른의 시선. 나는 그 순간을 ‘누군가로부터 기대와 만족감, 애정 등을 담뿍 전해주는 눈빛'으로 기억하기에, 담임선생님을 내 평생의 은사님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어언 열 다섯 번 가량 새로운 아이들을 담임하신 끝에 선생님은 정년을 맞이하셨다. 우리들도 이제 다 커서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선생님의 마지막만큼은 한데 모여 축하해 드리자! 마흔 명에게 쭈뼛대며 연락을 걸었고, 스물 몇 명의 아이들이 화답하여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역시 우리는 남다른 친구들이야. 십오 년이 지났는데도 자발적으로 과반의 아이들이 모여드는 초등학교 동창들이 어디 있겠어? 아이들에 대한 우정과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완연히 차오르는 기쁜 이 순간을 누리자. 행복에 겨운 몇 시간을 만끽했다. 선생님은 먼저 들어가시고,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술잔을 맞댄다.

 “역시 우리 1년은 특별했던 것 같아. 다들 착한 애들이라 그렇겠지만, 특히 선생님이 워낙 좋으신 분이었던 덕택이 크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도 지금까지 잘 지내는 거겠지?”

 “어⋯ 그게ㅋㅋㅋ 꼭 그렇다기보다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에게는 다른 여느 학년에서의 선생님과 다를 바 없는, 그러니까 ‘은사님’과 ‘강사’ 사이에 위치하는 적당한 사람이었다는 진술이었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러면 나는 왜 그토록 선생님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데? 그야⋯ 네게 잘 대해줬으니까. 세상에 그게 말이 돼? 그럼 너희들은 15년이 지나서 여길 왜 온 거야? 다른 담임들과 다를 바 없는 선생님 정년퇴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야⋯ 네가 가자고 하니까. 거절할 이유까지는 없잖아.

 이 길고도 깊었던 나만의 착각을 기억의 상대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확증편향이라고 불러야 할까. 마흔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어른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것까지는 반박 불가능한 사실이다. 즉 1년간 형성된 경험의 덩어리는 누구에게나 같은 질량으로 존재했다. 41명 중 누구의 시계를 돌이켜 보더라도 똑같은 사건사고가 보존되어 있을, 엄연히 동일한 2003년의 창원시 상남동 6학년 1반 교실이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별에서 출발한 빛들은 시간과 공간이 멀어질수록 천차만별의 방향으로 흩어지니, 똑같은 시공간에서 출발한 기억들은 15년이 흐르는 사이에 천차만별의 경로로 나아가고 있었다. 갈림길은 각자의 다짐에서 시작된다. 그 공통의 시공간을 무엇이라고 자기 삶에 남겨놓을 것이냐, 기억의 출발지를 얼마만큼 강렬하고 강력하게 타오르던 별빛이라고 부를 것이냐, 에서 마흔 한 가지 방향이 생겨난 게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기억에도 그런 지평선 같은 것이 있느냐는 거다. 어느 노래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빗대었던 블랙홀의 시작, 그 선을 넘어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경계선 말이다.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심지어 대단히 강력하고 우주적인 그 어떤 것인데, 빛조차 통과할 수 없으니 쳐다볼 방법도 없는 울타리. 우리가 저 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떠나갈 수도 없는. 그토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지평선 같은 것이 기억에도 있다면.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안녕을 고해야 하겠기에.

기억나? 그날의 우리가 잡았던 그 손엔 말이야 설레임보다 커다란 믿음이 담겨서 난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눈물이 날 것도 같았어 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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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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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재

    0
    about 2 months 전

    경계 너머로 훔쳐본 영영의 기억, 흥미롭습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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