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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배반>에 대하여, 화요지기 적문이 쓰다

2024.03.19 | 조회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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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알람소리가 시작된 건 서낭당의 개가 짖는 걸 멈춘 뒤였다. 일찌감치 맞춰둔 알람보다 십오 분은 더 일찍 왕왕댄 얄미운 녀석. 누가 개놈의 시끼 아니랄까봐, 하면서 얇은 요를 사이에 두고 밤새 뼈를 쑤셔댔던 나무 바닥에서 일어나니 산 아래 특유의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당초 불편한 잠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낼 작정으로 온 건 아니었지만, 일 핑계로 평소에 잘 찾아오지도 않던 할머니 댁을 두고 같은 핑계를 대며 다른 곳에서 자기는 껄끄러웠던 탓이다.

 아침 햇살이 넉넉히 채워진 앞마당. 콘크리트로 마감해 풋풋한 맛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봐온 나름 역사가 있는 곳이다. “여 서울 천지 어디에, 산 미데다가 이런 좋은 집이 또 으딨냐? 아, 할아버지 말이 틀리냐, 안 틀리냐?” 버릇처럼 하시던 할아버지의 말씀은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끔 진입로를 착각한 등산객이 뒷길을 드나드는 것만 빼면, 이런 좋은 데가 없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주제에 가까운 게 산이니 공기 좋은 건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매번 설이나 추석 때의 귀성길이니 귀경길이니 하는 말은 내겐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다. 학교 다닐 때 술자리가 한참 늦어질라치면, 내심 할머니 댁에서 자면 된다는 식으로 막차 시간을 일부러 못 본 체하기도 했다.

 이 귀향 아닌 귀향을 결정한 건 말 그대로 일 때문이었다. 오게 된 이유가 오지 않은 이유와 같게 된 건 순전히 우리 부서에 사람이 없어서다. 정확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라나. 부서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조그마한 출판사지만, 당선작을 써 내리신 작가님은 대리급 이상이 모시라는 매뉴얼은 어느 대기업보다도 철저히 지켰더랬다. 결국 회사에서 해준 믿을 만한 사람이란 입 발린 말은, 우습게도 삐끗하면 책임질 누군가를 의미한다는 걸 증명해주는 꼴이었다.

 직책에 걸맞게 잦았던 외근이지만, 이 근처로 나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니 신기한 일이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향수(鄕愁)를 느낄 만한 곳이라고는 할머니 댁 말곤 없기 때문이겠다. 갈수록 알게 되는 사람도 장소도 너무 많았고, 그럴수록 이미 지난 것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바래지곤 했다. 몇 바퀴를 돌아도 질리지 않던 운동장도, 석식 시간에 학교를 빠져나와 치킨 한 마리씩 착실하게 먹던 친구도, 퀴퀴한 냄새가 빠지지 않던 동아리 방도, 왁자한 술자리에서 실없는 말로도 한 시간은 같이 웃었던 동기도.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유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말하자면 언제나 현재를 살기에도 벅찼다고나 할까. 당장 열한 시에 있을 독대도 내겐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내게 과거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였다.

 “딴 번 좀 틀어봐야.”

 막 할머니의 부탁으로 고추나무에 물을 주고 돌아오니 안마의자에서 들려온 할아버지 말씀. TV엔 할머니가 보시던 연속극이 틀어져 있었다. 누구한테 하신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일단 보이지 않는 리모컨을 찾았다. 리모컨이 없는데요, 하고 입을 떼려니 주방 쪽에서 “거 놔둬요!” 하며 할머니가 꽥 호령하셨다. 듣는 둥 마는 둥 “리모컨이 왜 웁서?” 하시다, 엉덩이에 깔려있던 리모컨을 이내 찾아내시더니, TV에선 으레 그랬듯이 느긋한 트로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작게 “지미.” 소리가 들렸다. 여전들 하신 모습에 헤 웃음이 났다.


 “여보세요? 어. 아이 그거 냉장고에 안 넣어도 돼. 그냥…”

 “거 아주머니, 버스에서 전화하지 마세요!”

 “…어어, 잠깐만. 아니 아저씨, 그렇게 크게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라디오도 켜져 있지 않던 버스 안은 돌연 신경질적인 기사와 억울해하는 승객의 승강이로 빠르게 소란스러워졌다. 하기는, 마주치는 같은 번 버스 기사에게 손 인사도 않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아까 뒷좌석에서 웅성대던 아이들에게 일갈할 때는 내심 고마웠는데, 그냥 하차 벨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에 예민한 사람인 모양이다.

 불편한 침묵 속에 언성이 날카롭게 높아질 때쯤, 어우, 지랄이야! 지랄은! 승객은 손가방을 깨부수다시피 카드를 찍곤 버스에서 내렸다. 갑작스런 화풀이에도 단말기에서는 하차입니다, 소리만 알뜰하게 퍼졌다. 운전석에서 꿍얼대는 욕지거리가 들려온 건 승객이 다 내리기도 전이었다.

 그게 내가 팀장님의 전화를 받지 못한 이유의 전부였다. 그게 이유가 되냐고 되물을 것까진 예상했지만, 그걸로 십오 분을 내리 쏘아붙일 줄이야. 차라리 받고 그 기사의 입가에 핸드폰을 갖다 댈 걸 그랬다. 아님 핸드폰으로 머리를… 아니다, 어쩌겠어. 그냥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다는 맘 편한 변명을 하지 않은 게 내 탓이요, 주말에도 불철주야 부서 일에 관심이 있는 젊은 상사를 둔 것도 내 탓이다.

 잘만 했으면 다르게 만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부하직원이 아니라 ‘접대’ 해야 할 작가로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또 내 탓이다. 그렇다고 졸업도 2년 만기로 착실히 유예해놓은 마당에 밥벌이까지 미룰 순 없었잖아. 스스로 등을 도닥이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멀리 가진 못한 전진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던 책은 맨날 보겠다야. 거기가 어디냐고 재차 되묻던 동기가 겨우 웃으며 쥐어짜낸 칭찬. 거기가 어딘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곳에 다니는 동기는 그렇게 위로인지 조소인지 모를 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면 한 대에 만 구천 원씩이나 하는 갈빗집에 올 게 아니라 냉동삼겹살 집에 데려갔을 거였는데. 새까맣게 타들어 간 건 불판에 눌어붙은 갈빗대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아예 틀린 말도 아니라 더 괘씸하다. 왜, 아주 놀리는 거면 화라도 낼 수 있는데, 그런 의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상대가 도리어 역정을 내는 상황 같은 거. 친구 말대로 글이야 매번 볼 수 있었다. 이런 당선작을 읽을 기회도 심심치 않았다. 재수 좋은 일이다. 특히나 이번 당선자는 더 그랬다. 그도 그럴 게,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질투가 날 정도였다. 우아하고 유려한 문체도, 뭉실뭉실하게 녹아나는 감상의 여운도,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성현’이란 이름도. 솔직히 흔해 빠진 이름이라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첫인상이 좋으면 뭐든 좋게 보이니까.

 편의점 끼고 돌아서, 파란 문 집 건너편에... 여긴가 보다. 할머니댁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손님이 오겠나 싶은 곳에 차린 카페는 그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곳이랬다. 중키의 나무를 꼼꼼히 심어 놓은 입구 길이 제법 그의 글과 닮아보였다. 빨간 벽돌과 시멘트가 얽히고설킨 외벽도, 평소 같았으면 하여튼 감성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냐며 조용히 볼멘소릴 했을 테지만 어쩐지 맘에 들었다. 하여튼 콩깍지가 무섭다니까.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아마 당겨서 여는 문이었나 보다. 유난히 뻑뻑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카페 직원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말투는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이어폰 너머로도 선명하게 들린 말이었지만, 예약이라는 단어가 귀에 한 번 턱 걸린 탓인지 황급히 이어폰을 빼며 바보같이 되묻고 말았다.

 “어, 네?”

 “예약하셨어요? 저희 매장이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서 예약 안 하셨으면 이용이 좀 어려우세요.”

 “아, 아뇨. 그 혹시 사장님 계신가요? 오늘 열한 시에 여기서 뵙기로 해서요.”

 눈썹을 한껏 치켜뜬 채 네? 하고 묻는 직원의 눈은 유별나게 동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깐 얼굴을 쳐다봤다. 말 그대로 낯익은 얼굴이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짧은 침묵 속에 늘어지는 색소폰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올 때쯤, 직원은 시계가 있을법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그랬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아! 오늘 열한 시 미팅 말씀이시죠? 일단 요 창가 쪽 테이블에 잠깐 앉아계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앉은 자리엔 볕이 잘 들었다. 주말 열한 시, 카페 창가자리라. 밥을 안 먹었더라면 여기서 늦은 아침을 먹고 가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침부터 큰손주 밥은 먹여야겠다고 푸짐하게 차리신 밥상을 비우고 난 다음이라 배가 하나도 고프진 않았지만, 빵이며 커피며 내로라하는 향기가 가득한 게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서 ‘집필’하는 ‘작가’라! 뭐 브라질산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고상하게 글을 쓰는 걸까? 항상 이렇게 쓰고 쓰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 건가- 파렴치한 생각을 하곤 한다. 말투는 어떨까? 뭐하면서 사는 걸까? 생각을 얼마나 할까?

 이런 저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내 앞에 누군가 의자를 뒤로 끌어 앉았다. 시선이 간 건 드르륵, 소리가 나기 전이었는데, 쟁반을 내려놓으며 앉는 건 다름 아닌 아까의 직원이었다. 동그란 눈으로 무슨 할 말 없냐는 투로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어... 성현 씨, 맞으시죠?”

 “네네,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당선자의 이름이 제 이름이라 밝힌 직원, 아니 사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커피 잔을 건네더니,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카운터에서도 봤던, 이 베이커리 카페의 –물론 적혀있는 대로- 이름과 이성현이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조우였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당황스러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주말에 이 작은 카페를 지키고 서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장 본인일 테고, 성현이란 이름도 여자 이름으로 많이 쓰잖아. 애초에 통화만 해봐도 알았을 일이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나름 핑계를 대기로 했다. 누가 묻는다면 말이지만.

 “아이고 차까지... 감사합니다. 여기 제 것도.”

 “아, 네.”

 “우선은, 당선 다시 한 번 축하드리구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당선작 관련 계약서하고, 당선 소감 관련해서 좀 여쭤보려고 이렇게 찾아뵙게 됐어요.”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건 언제나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어색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건 더 어색했다. 조심스레, 받은 명함이 가려지지 않도록 자료라고 할 것도 없는 종이쪼가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려는데, 글쎄 이 사람이 내 명함을 골똘히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예의 그 둥그런 눈에 살짝 찌푸린 미간인 채로였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실까요?”

 “아아, 아니에요. 그냥 제가 뭘 착각한 것 같아서요. 이거 읽어보면 되는 건가요?”

 “네. 읽어보시고 궁금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착각한 게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그녀는 이내 무섭게 테이블 위의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괜히 멋쩍어져 덩달아 계약서 사본을 읽었다. 아니 읽는 척을 했다. 이미 골백번은 본 문서다. 불규칙적인 들여쓰기가 눈에 밟히는, 그러나 또 수정하지는 않는 요상한 글이다. 하던 대로, 쓰던 대로. 언제나 그랬다. 눈치 채는 사람도 없고, 설령 눈치 채더라도 그걸 면전에 얘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팔자 좋은 이유였다. 출판사 직원치고는 어이가 없는 처사긴 한데, 그걸 하나하나 따질 거였으면 여기 앉아있지도 않았다. 처음엔 여러 가지 해보려고 했다. 청년, 스타트업, 인디라... 못할 것이 없을 단어의 조합이었지.

 “어, 여기.”

 “네?”

 “별 건 아닌데 여기 띄어쓰기가 잘못되어있어서요. 두 번째 장에 육 번이요.”

 “네, 잠시만요... 맞네요. 죄송해요, 제가 드리기 전에 확인했어야 됐는데.”

 “아니에요. 제가 이런 거에 좀 집착하는 그런 성격이라서. 그거 말고는 제가 딱히 말씀드릴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여기 싸인만 하면 되나요?”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쯤 벌어질 만한 일을 예상은 해놨는데, 대비를 하지 않아서 결국 그르치고 말아버리는 경험. 못할 것이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못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이럴 때면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마련이지만, 그 전에 몰려오는 부끄러움 한 줄기. 결국 내가 안 한 거잖아.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 알았으면서.

 괜히 울적해진 마음으로 수상 소감이니 인터뷰니 삐적삐적 받아 적었다. 적으면 적을수록 빈틈이 없어지는 사람이었다. 마음속으로 언제나 바라던 그 모습. 앞에 앉아있자니 마음 한 켠 어디쯤에 구멍이 나는지 자꾸만 찬바람이 들었다. 나는 책상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더 꽉 쥐었다. 부들댈 정도로 쥐다가, 힘을 뺐다가, 다시 쥐고, 폈다. 손금께가 희게 물들을 때쯤, 그제야 좀 나아진 기분이 되었다. 다 식은 커피를 털어 넣자 채 갈리지 않은 가루가 씹혔다.


 “저기 근데, 혹시 고운초 나오지 않으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그렇게 쭈뼛거리며 인사를 나누고 나가려니 비수처럼 날아 들어온 질문 하나. 아까부터 손짓하며, 입술을 옴싹달싹하던 게 말할 게 있는 것 같더라니. 던지는 입장에서는 살의(?)를 전혀 담지 않았을 것임에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모교의 이름을 맞춘다면 그 누군가는 분명 무당이거나 나도 모르는 내 동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주팔자 보고 문학에 일가견이 있는 베이커리 카페 사장?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 세 개만 이어봐, 하면 나올 법한 말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가 모르는 초등학교 동창?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아무리 엮어봐도 이성현이란 이름은 가끔씩 꾸는 4학년 시절의 악몽에도 없었다. 사실 기억에 있든 없든, 유년기의 인연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까다로운 이지선다로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이놈의 고질병이란.

 “아... 네, 여기 근처에 있는 거기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럼 맞아요.”

 “맞죠?! 아니, 나 몰라? 우리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도망치고 싶었다. 그거 그냥 눈 딱 감고 거짓말하면 될 걸 또 주절댔네. 하필이면 왜 또 같은 반이냐. 이성현, 이성현, 이성현... 누구지 대체. 스쳐지나가는 그나마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 몇 개. 최상민, 정지혜, 김예솔... 그 중 무엇도 이 카페 사장님의 얼굴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성현이라는 이름도 내 기억에 없잖아. 물밀 듯이 넘쳐오는 생각을 뒤로 하고,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억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둥그런 그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기 때문이다.

 “제가 정말 죄송한데, 옛날 기억을 잘 못해서요. 이성현이라는 성함을 가지신 분들도 제가 다른 곳에서, 아니 다른 분들도 많이 봤고 그래서…”

 “너 나랑 짝꿍 연속 세 번 됐다고 엄청 뭐라 했었잖아. 그래서 내가 등짝도 많이 때렸는데. 윤선생 영어학원도 맨날 같이 다니구. 진짜 기억 안 나?”

 “…아아! 알죠, 아니 알지! 진짜 반갑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에선 여전히 졸업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등짝을 맞았어? 내가 여자애랑 말을 섞었다고? 분명 고등학교 때까지도 여자애들한테 말도 못 붙였던 것 같은데.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광의 3회 연속 짝꿍의 주인공이자 학원까지 같이 다닌 정체 모를 단짝친구는 함박웃음이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아까까지만 해도 자못 진지한 문학관을 피력하던 성현 씨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떻게 이렇게 보냐며, 어차피 장사도 안 되니까 얘기 좀 더 하다 가라고 의자를 다시 끌어 앉았다. 너무나도 반가워하던 그 얼굴을 뒤로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우리 그 때 네 시까지 남아가지고 연필 끼워서 다 다시 감아놨잖아. 너 그거 뭐냐, 맞아, 카세트테이프 가지고 맨날 장난 쳐서 괜히 나도 같이 혼나고! 아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네, 진짜?”

 “아, 카세트테이프 그거! 진짜 언제 적 물건이냐. 근데 우리 몇 반이었지?”

 “몰라? 4학년 6반이었나 그랬을걸? 아니 그건 그렇고 너 그것도 기억나? 그때 영어 시간 때 원어민 쌤이랑…”

 이제 듣고 나서야 알 듯 말 듯 한 얘기들인데 성현 씨, 아니 성현이는 분명한 추억으로 간직한 것처럼 보였다. 달나라 여행을 하듯 꿈꾸는 얼굴이지만 정확하게. 나도 덩달아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나갔지만, 손목에 걸고 빙빙 돌려댔던 하늘색 나이키 실내화 주머니나 4분단 뒤쪽 사물함 위에 놓았던 학급 거북이 사육 통처럼, 파편 같은 기억들만 조금씩 떠오르고 말기 일쑤였다. 아무렴 과거의 기억으로 날아가지 못한 채, 날아가는 시늉만 낼 줄 아는 사람은 마법이나 날개 따위를 꿈꾸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 현지는 적어도 행복해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기억을 가진 채 웃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성현이가 기억하는 이십 년 전의 나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다. 어렸을 때 더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문제는 그 정도가 예상한 것보다 심각해 듣는 게 고역이었다는 점이다. 열한 살이 느끼지 못한 수치심을 대신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미운 건 일곱 살뿐만이 아니라 지나간 모든 날들이었다. 넌 대체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계속되는 성현이의 얘깃거리에 맞장구밖에 쳐줄 수 없었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 어쩌지.

 “야, 너무 옛날 얘기들이다. 요샌 어떻게 살았어? 그러고 보니까 카페는 어떻게 차렸대?”

 “뭐, 그냥. 계속 여기서 살다가 사업이나 한 거지. 누구처럼 작별인사도 안 하고 전학가진 않았으니까.”

 서투르게 주제를 바꾸려다 얼굴이 굳었다. 억지미소를 지은 채 아아니, 하면서 엄한 잔을 들었다. 새로 채워진 커피는 벌써 다시 식어버려 새큼한 채였다. 눈썹을 샐룩 치켜들면서 어때 요놈아, 성현이는 말없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맞다 너. 작가 하고 싶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다니더니, 어떻게 꿈을 좀 비슷하게 이룬 거네? 너 예전에 장래희망 적으라고 하면…”

 작가는, 너지. 하면서 웃음으로 넘기려니 목이 컬컬했다. 분명 말투는 아까 전의 그대로였지만, 추억 얘기에 겁 없이 삐져나온 마음이 조금씩 베여나갔다. 어릴 적 내 꿈은 왜 티라노사우루스 따위의 희망차고 허황된 것이 아니었던 건지. 그랬다면 지금처럼 뜨끔하고 따끔거리진 않았을 텐데. 입을 열기 무섭게 쏟아지는 우리의 기억들, 아니 성현이의 기억들은 대단하게도 들을수록 분한 마음이었다.

 “너 내 건 기억하지? 내가 그래서 너 작가 돼서 시나리오 쓰면 내가 주연…”

 “넌 대체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씹어 삼켰던 말을 다시 게워냈다. 꾸역꾸역 미뤄둔 말을 결국에 하는 것도, 말허리를 잘라낸 것도 모두 익숙지 않은 일이라 스스로도 놀란 터였다.

 “아니, 뭐... 그 정도는 다 알지. 너는 안 그래? 우리 친했잖아.”

 “친했...던 것 같긴 한데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는 게 신기해서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난 기억이 거의 없거든. 전학 가서 그런 것도 있고.”

 거기까지 얘기를 하는데 아차 싶었다. 들떠왔던 표정이 착 가라앉는 게 이상하리만치 나른한 눈길로도 훤히 보였지만, 안경알을 닦느라 보지 못한 척했다. 아무렴, 이제껏 척만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의외의 모습을 보인 건 성현이었다. 오른 눈부터였다. 그 큰 눈 안에 어른어른 눈물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뭇조각처럼 떠오른 한 기억. 난 예전부터 여자가 울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애들이 우는 건 하루 이틀 일이겠지만, 서른이 넘은 아이가 우는 건 흔치 않으니 더 곤란했다. 좀 서운한 얘기겠다 싶었지만 울 것까지야. 야아 왜 그래, 하며 넉살좋게 말을 걸까 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어린 나는 야, 얘 진짜 우는데? 하며 안절부절못했던 나처럼.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성현은 화장실 방향인 듯 가게 뒤편으로 뛰듯 걸어갔다. 그건 빠른 걸음이라 말하기도, 뛰는 거라 말하기도 애매한 몸짓이었다. 졸지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터라 잠시 빈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돌연 편치 않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친구를 울린 것도 울린 것이거니와,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할 ‘파트너십 라이터’에게 너무 무례했던 걸까 싶었다. ‘투 트랙 고객 만족’이라느니 ‘서플라이 체인의 내재화’ 따위의 지론을 설파하기 바빴던 입사 초기의 워크샵이 떠올랐다. 번지르르한 말과는 달리 엠티에 가까운 워크샵이었다. 생각하고 있자니 엠티 다음날 아침이라도 되는 듯 머리가 아파왔다. 팀장 귀에 들어가면 또 깨질 게 분명했다. 제발, 할 수 있는 건 성현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뭐 엄청 무례한 것도 아니었잖아. 왜 그만두시는 건지 여쭤도 될까요? 저와의 추억을 다 까먹어서요. 그 말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건 어지간한 순발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관자놀이를 짚고 동글동글 돌려봤다. 두통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익숙하지. 다행히 가방을 뒤적이면 약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뺏어갈 누군가라도 있는 듯 입에 황급히 털어 넣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로 간신히 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순간, 난 쥐어짜듯 생각한다.

 어쩐지 커피가 너무 시다 싶었다.


 엎어진 아이의 뒤통수가 보인다.

 한참 전 기억에서 지워버린 곳, 기억도 안 나는 어린애. 얘가 아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했고, 흙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웃으면 될 일이라고 믿고 싶었다.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는 학종이로 접은 종이배들이 철 이른 낙엽처럼 색색이 흐트러져 있다. 모아둔 컬렉션이 산산이 난파되는 순간, 목공 풀로 붙여놨던 지혜의 루루 선장도 덩달아 흙바닥에 처박혔다. 야, 씨발아 뒤질래? 공 이쪽으로 보내지 말랬잖아. 그 아이는 눈물을 삼키려고 애쓰면 턱부터 덜덜 떨렸더랬다. 헐 얘 눈에서 피 나! 야 괜찮아? 선생님! 중구난방으로 묻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물건은 줍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발걸음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집은 반대 방향이었다.

 야! 실내화 주머니에 뭘 넣어놓은 거야아아아아아!

 번지는 눈길 아래로 무언가 후두둑, 쏟아져 내린다. 위에서 떨어진 게 분명하다. 던져진 실내화 주머니에 담긴 파편인지 싶어 위를 쳐다본다. 학교 정문 옆 담벼락을 가르는 모래주머니가 터진 채 모래를 토해내고 있었다. 서투른 발길질에도 투툭, 툭 끊겨버려 터져 나온 것이 머리카락 사이로 알알이 박힐 때마다 유리 조각인 것마냥 신경이 곤두선다. 별 일 아니라고, 별 일 있겠냐고 되뇌는 맘과는 다르게 발은 계속해서 휘청거린다. 어느 바닥없는 가뭇한 구덩이에 발을 딛는 기분이다. 걸음마다 악악대는 아이들의 소리는 멀어졌지만 어떤 열기가 귓가에 어리는듯했다. 어지우리만치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속절없이 흐르는 한 줄기 식은땀. 아랫배가 아파왔다.

 아프다고?

 네가?

 아! 스읍.

 쉼 없이 짤깍, 짤깍, 이던 핑킹가위소리가 멈춘 뒤였다. 차례가 오기만을 보고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면 상민이의 길쭉한 얼굴과, 아래에는 얇고 붉은 두 줄로 너덜거리는 중지가 보인다. 그와 닮은 빨갛고 길쭉한 가위는 이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곧이어 큼지막한 핏방울도 줄지어 떨어졌다. 급식 메뉴가 고등어조림인 게 오히려 다행인 셈이었다. 점심시간보다 급한 발걸음이 양호실로 이어졌다. 그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지만 적극적인 부축과 함께였다. 급소를 겨냥당한 사냥감마냥 핏자국이 뒤따랐고, 복도와 계단을 지날수록 웅성거림은 커져갔다.

 야, 괜찮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지? 반복되는 말만 맴돌았다. 1층 드림 클래스룸 앞의 전면 거울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마치 피란 피는 전부 빠져나가버린 모습이었을 테다. 층계를 하나 더 내려갔을 때도, 양호실 앞에서도 둘 사이에는 그 짧은 문장 외에는 말이 없다. 지하의 곰팡이 냄새와 양호실은 그 둘처럼 어울리진 않았다. 다만 피비린내가 어울릴 뿐이었다. 이윽고 돌아온 그를 볼 땐 가슴이 저릿해 불편했다.

 불편하다고?

 네가?

 아, 이번엔 지인짜 그냥 보기만 한다니까.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이제 목과 다리는 아예 드러내지도 않은 채였다. 너 근데 귀두가 거북이 머리라는 뜻인 거 알아? 기두가 뭔데 형아? 시시덕대는 애들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며 얼버무리는 것도 이젠 지겨울 정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어물거리며 나온 말은 ‘알았어, 대신...’ 이었다. 그럼 알았다고 한 거다! 우르르 뛰어가는 무리 뒤로 남아있는 건 텅 빈 사육 통을 든 아이뿐이었다. 뒤집어진 밥그릇 위로 지독한 오줌이 짓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데 그러면 죽지 않을까?

 야, 개미도 안 죽어. 내가 봤어. 얜 보호막까지 있는데 죽겠냐?

 눈 아픈 녹색으로 덮인 옥상에서 예솔은 핏대를 세운다. 등껍질을 잡힌 거북이는 어느새 고개를 쳐들고 다리만 휘적대고 있었다. 아직도 낫지 않은 눈에 고름을 단 채였다. 제 딴에는 닿지 않는 물길을 이상하리만치 가볍게 헤쳐 나가는 것이었겠지만, 녀석은 쨍한 햇볕 아래 한 구석 허공 위로 흐느적거리고 있었을 뿐. 열띤 토론 끝에 무리는 난간에 선다. 절충안은 껍질을 땅으로 향하게 한 채 떨어뜨려보자는 것이었다. 파각,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도 거북이는 수 초 동안은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적어도 수 초 동안은. 허벅지가 들리는 듯한 아찔함을 즐기는 아이들 사이로,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마음을 졸였다고?

 네가?

 어! 내가! 너넨 계속 똑같은 말만 하지 말고 이거 좀 지워봐!

 안 지워져.

 야, 최상민! 너라도 좀 도와줘봐!

 그거, 안 지워진다니까.

 코팅된 종이 위의 손가락은 뜩, 뜨득 정도의 불쾌한 소리를 낸다. 비비고 또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얼굴. 점점 뜨거워지는 손끝을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비빌수록 번지는 게 잉크뿐만이 아닌 듯하다. 보기만 하지 말고 좀 도와달라고, 씨. 그때였다. 굳게 붙어있던 앨범의 뒷장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안되는데. 아직 다 지우지도 못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바락바락 구겨내도 찢기지 않는다. 약 올리듯 팔락대는 종잇장이 한 꺼풀씩 덮이는 걸 보며 나는 뒤늦게 기억한다. 졸업 앨범의 학급 소개는 5반까지밖에 없다는 사실과, 깨진 소주병이 담긴 신발주머니, 그리고 빨간 핑킹가위에 지워지지 않은 채 적혀있는 이름은, 다름 아닌 내 이름이라는 것을.

 야, 너도 같이 한 거다?


 몽롱함 속에 느껴진 건 빌어먹을 빵 냄새였다. 아마 앞으로 먹지 못할 빵 냄새.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라도 먹어볼 걸 그랬다. 배가 고픈 것이 꽤 시간이 지난 듯했다.

 “…쩜 이렇게 똑같냐, 웃기다, 진짜...”

 다가오는 흐린 실루엣에다 뭐가 똑같냐고, 그전에 풀어달라고, 아니 그전에 이게 뭐고 대체 누구냐고 외치려 했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열려, 아니 입은 이미 열려있었고, 말을 하려고 하자 야무지게도 채워놓은 입마개만 덜컥대기 시작했다.

 “아, 깼구나. 언제 깨나 했어.”

 거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으읍, 뿐이었다. 아마 입마개가 없었다면 욕지거리 중 하나였을 테지.

 “그래도 야, 처음에 지혜 들어올 때만 해도 나 좀 떨었다? 뭐, 이번엔 새로운 접근법이라고 할까? 작가 구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야. 성현이가 해줬으니 망정이지….”

 그제야 직감했다. 지혜, 상민이, 예솔은 이미 세상에 없겠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순번은 나일 거라는 걸.

 “감동이지 않냐? 손가락도 하나 없는 사람이 너 하나 낚겠다고 열심히 쓰더라. 아, 너 성현이가 누군지 모르지 아직도?”

 뭐야 대체. 아까부터 자기가 두 명인 것마냥 얘기하는 이 년은. 이제부터 눈을 아주 감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차피 보이는 게 별로 없기도 했다. 순간 아무렇게나 떨구었던 고개가 천장으로 홱 젖혀지더니 이내 눈이 뜨였다. 내 의지는 아니었고, ‘성현’이가 두 손으로 한 일이었다.

 “이새끼 표정봐, 웃기네. 성현이가 아직도 나인줄 알지? 제대로 봐봐.”

 로맨틱한 연인의 키스신이라도 되는 듯 ‘성현’은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이상하리만치 동그랬던 그녀의 눈. 부릅뜬 왼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아직 가시지 않은 약 기운 때문에 보이는 환각이겠지, 환각이 맞을 거야. 눈을 부빌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부비고 싶었다. 그러나 슬슬 움직이는 눈알 위와 아래로, 그녀가 두 손가락으로 제 눈두덩이를 벌리고 나서야 환각이 아님을 알았다. 쑤욱, 말 그대로 알처럼 빠져나온 눈알이 내 왼눈에 떨어졌다. 눈과 눈이 맞닿은 순간, 으으읍, 소리 아닌 소리만 낼 수 있을 뿐.

 “덕분에 한 쪽엔 렌즈 안 껴도 되더라. 고맙다. 넌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겠지만.”

 외눈박이가 된, 아니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외눈으로 살아왔던 그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현지, 구나. 개같은 년. 그때 그렇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주 밟아버렸어야 했던 건데-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든 채로 팔을 치켜들었다.

 “난 너네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다니는 게 싫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바지가 따뜻하게 젖는 게 느껴졌고, 이현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진짜... 너네는 어쩜 그렇게 다 똑같냐.”

 뭐가 그렇게 똑같은지 이제 알 수는 없다만, 돌아오지 말 걸 그랬다.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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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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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염왕

    0
    2 months 전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어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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