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첫사랑의 기억

<인생 첫 기억>에 대하여, 금요지기 수염왕이 쓰다

2024.03.15 | 조회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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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우리 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의 여자고등학교와 붙어 있다. 교문도 한 개고 운동장도 같이 쓴다. 내가 남자 중학교를 나와서 그런지 매일 오며 가며 여학생들을 볼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반면 여학생들은 나 같은 남학생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마주칠 때마다 싫은 티를 팍팍 내고 다녔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여고 건물 앞에 있는 커다란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건물 안에 있던 여학생 몇몇이 창문 밖으로 "거울 본다고 뭐가 바뀌냐!”, “그만 보고 너희 학교 쪽으로 꺼져!" 라며 욕을 해댔다. 나도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냥 시키는 대로 꺼져줬다. 쫄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오늘따라 여학생들이 좀 이상하다. 뭘 잘못 먹었나? 지금 우리를 막아서고는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어대는데 여간 적응이 안 된다. 아, 오늘이 여고 축젯날이었구나.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공들여 차린 동아리 부스의 영업을 위해 평소 모습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교태를 부렸다. 내 친구들은 이에 못 이기는 척, 하나 둘 동아리 부스로 끌려갔다. 그 모습들이 어찌나 한심해 보이던지. ‘바보들, 나는 이런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아.’ 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이어가려던 중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봤다. 검정 스커트에 빨간 가죽 재킷을 입고 앳된 얼굴에 안 어울리는 진한 화장을 한 그녀는, 안방 화장대 앞에서 엄마 몰래 꾸미고 화장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는 내게 작고 수줍은 목소리로 동아리를 소개하고는 내 교복 소매 끝을 잡고 흔들었다. 아! 나도 친구들 처럼 바보였구나! 이런 귀여움에 어찌 안 넘어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순순히 따라가 주기는 또 싫어서, 나는 대담하게도 그녀에게 "팔짱을 끼워 준다면 같이 가줄게."라고 말했다. 잔뜩 고조되어 있는 축제 분위기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살며시 내 팔을 안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운동장을 지나 그녀에게 이끌려 걷는 계단 위에서, 지금 같은 순간이 또 이어지길 바라며, 나는 그녀의 작은 손바닥을 펼쳐 그 안에 내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문자메시지가 온 건 축제가 끝나고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의 연락을 무척이나 기다렸지만, 이제는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겨우 연락이 온 거다. 애써 덤덤하게 안부를 묻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이번 주 토요일, 학교 끝나고 교문 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고 보니 첫 데이트다. 중학교 때 한 번, 펜팔하던 서울 여자애를 만난 적이 있긴 했는데 그때는 별 뜻 없이 만났던 거고 기억도 잘 나질 않으니, 이번이 첫 데이트가 맞다. 갑작스런 데이트로 얼떨떨해진 나를 위해 친구가 데이트 코스를 짜줬다. 받아 적으라는 말과 함께 교문 앞에서 2번 버스를 타고 부평 문화의거리로 간 다음, 거리 중심에 있는 일번가 김밥이라는 곳에 가서 밥을 먹고,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투투노래방에 갔다가, 부평역 방향으로 30미터 정도 가면 있는 캔모아에 가서 생과일주스를 먹으라고 했다. 이어서 내가 적고 있는 노트를 뺏더니 거기에 약도를 그려 내게 다시 돌려줬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 어제 데이트 장소 사전답사 가느라 야간자율학습 도망쳤던 걸 걸리는 바람에 선생님께 붙잡혀 있던 탓이다. 서둘러 도착한 교문 앞 버스정류장에는 검정 목도리를 한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천천히 휘감아 주었다. 추운 날씨에 훤히 드러나 있는 내 목덜미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버스 왔다." 라는 말과 동시에 내 손을 잡고 버스에 뛰어올랐다. 맨 뒤 좌석에 나란히 앉은 후에도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알았다. 긴장하면 손에서 땀이 난다는 걸. 그녀는 내 손을 펼쳐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의 물기를 교복 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난 오늘 손을 씻지 않기로 다짐했다. 부평에 도착하고 나서는 먼저 계획대로 밥을 먹었다. 다행히 밥 먹을 때 음식을 흘리지 않았고 말하면서 입에서 밥풀이 튀어 나가지도 않았다. 이어서 갔던 노래방에서 내가 심한 삑사리를 낸 게 좀 창피했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통금시간이 9시라고 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뒤돌았을 때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그녀의 작은 손도 함께 흔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뒤돌아 전속력으로 뛰었다. 사실 아까 노래방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화장실 다녀온다고 말하기 창피해서 참았더니 지금 방광이 터질 것 같은 지경이다. 겨우 아파트 상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된다. 숨을 크게 한번 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오늘따라 왠지 하늘이 높아 보인다. 날씨가 흐려 별이 보이지 않음에도 별을 찾아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런 꼴사나운 대사들을 내뱉고 싶어졌다. 그러다 문득, 아까 그녀가 땀난 내 손을 치마로 닦아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오늘 손 씻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멍청하게 아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버렸다. 안타깝다. 안타까운 일이 또 있는데 오늘 데이트로 한 달 치 용돈을 다 써버렸다는 거랑 이제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거. 그래도 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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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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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재

    0
    about 2 months 전

    '그래도 뭐 괜찮은' 감정을 꾹꾹 눌러쓴 수줍은 수염왕의 러브스토리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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