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겠지만, 당신은 죽었습니다.”
“...”
“당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군요.”
“...”
“이곳 림보에서 당신은 7일간 머물게 될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선택하세요.”
“... 없어. 그런 순간이 나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
“사흘 안에 선택해야 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직원들이 도와줄 수도 있어요.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
살면서 나에게 좋은 기억은 없었다. 인간의 생에선 가난했고, 도깨비가 되어서는 외로웠다. 불행이란 단어가 늘 나를 따라다니는 듯했고, 그것을 피하려 쫓기듯 도망치다 보니 이곳에 다다랐다. 지금 드는 생각은 그저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의 생에서 나는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이었다. 한 귀족의 땅에서 소작하던 아비는 수탈에 못 이겨 나를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산속에서 나는 엄마를 만났다.
“한아, 저녁상 좀 차려라.”
어느 날, 나무를 하고 돌아온 아비가 한 여자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산속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아니 누추한 우리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티가 나는 여자였다. 이제 우리와 같이 살게 될 거라고 하였다.
“아버지, 누구예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왜구에 잡혀있다가 도망쳐 나온 것 같다. 갈 곳이 없는 것 같아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아비는 대강 나에게 둘러대고는 눈치를 보더니 잠시 나갈 곳이 있다고 하고는 보자기를 들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세 식구가 되었다. 엄마는 하얀 손으로 바느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녀렸던 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여동생이 태어났다.
“엄마, 너무 예뻐요,”
하얀 백설기를 닮은 여동생을 보며 말하는 나를 엄마가 기특한 듯이 쳐다보더니 하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한이가 잘 보살펴 줄 거지?”
“네, 제가 지켜 줄 거예요.”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비와 나는 나무를 하러 가고, 엄마는 집에서 여동생을 돌보는 일상들. 불행은 언제 시작된 걸까. 아니 그때도 누군가에게 불행은 진행되고 있었던 걸까?
해가 지나고 엄마의 배는 다시 불러왔다. 남동생이 태어난 날 아빠는 크게 기뻐했다. 다섯 식구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며 엄마에게 줄 것이 있다고 결심한 듯 말하더니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싸고 있는 보자기를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주었다. 보자기를 펼치니 화려한 비단옷이 나왔다. 비단옷을 본 엄마는 크게 기뻐하더니 곧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비단옷을 입은 엄마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리고 그 모습이 진짜 엄마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와 내 동생들은 사라져버렸다.
나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 이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는 배신감으로 온몸이 휩싸였지만,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밤, 낮 없이 사라진 그 여자를 찾으러 산속을 다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 여자는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남은 건 원망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도깨비를 만났고 나는 나에게 그 여자의 기억을 가져가게 했던 그 도깨비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꿈 도깨비가 되었다.
‘최악이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기억해버렸어.’
이곳은 이상하다. 여태 잃어버렸던 기억을 기억하게 만든다. 정원의 빈 벤치에서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데, 한 할머니가 옆에 앉아버렸다. 불편한 마음에 일어나려는 찰나 할머니가 혼잣말을 시작했다.
“나랑 같은 날에 들어온 총각이구만.”
어린 아들 사진을 들고 있는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가지고 갈 기억은 선택했나?”
“...”
“나한테도 자네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다네. 이 사진은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이지.”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레 사진 속의 아들을 만지는 할머니를 보자니 불편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를 버리고 간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한 번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입양한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마지막 기억도 아들을 입양했던 그날을 선택할 거라는 그녀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한 적은 있을까. 친자식이 아니었던 나만 버리고 간 그 여자는 나를 아들로 여긴 적이 있긴 했던 걸까. 생각할수록 초라해지는 기분에 점점 더견디기 힘들었다.
“기억을 선택했나요?”
“... 못했습니다. 잠시 더 여기에 머물러도 될까요?”
나는 림보에 남기로 했다. 잠시 이곳에서 일하며 마지막 기억의 선택을 보류하기로 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인생 최고의 기억은 그 여자와 함께한 순간이다. 그 여자에게 나는 잊고 싶은 기억일지라도.
하지만 차마 지금은 그 기억을 선택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이 기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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