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이루는 구원

<기억 속 작품>에 대하여, 화요지기 적문이 쓰다

2024.04.16 | 조회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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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이 글은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 싱글 플레이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 걸까요? 많은 돈으로?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연인으로? 그것도 아니면 전능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심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멋지게, 그것도 풀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논술형 답안지로 풀어낸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2018년작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입니다.

 아서라는 캐릭터가 되어 20세기 초의 미국을 누비는 갱단 생활을 하면서 겪는 갈등을 담은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 이 게임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입니다. 디테일 변태들이 모여 만든 걸작, 사나이의 로망을 자극하는 마초 카우보이 시뮬레이터, 엔딩을 보지 않고 계속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 등등.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평가는 이겁니다. ‘내가 아서고, 아서가 나였다’.

 잠깐 장르 얘기 좀 하겠습니다. 게임은 시각과 청각, 각본과 연출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영화에 비견됩니다. 종합 예술이라는 평가는 과연 그러한 둘의 공통점을 보여주죠. 하지만 영화와 게임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영화는 ‘보지만’ 게임은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영화는 분명 고도의 영상 예술이지만 소비하는 주체는 관객입니다. 아무리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다가오더라도, 연출이 훌륭해 몰입감에 전율하더라도 관객은 그들의 세계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게임의 주체는 플레이어입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나 자신입니다. 게임의 이야기는 내가 펼치기 전까지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게임이 짜놓은 판 위에서, 플레이어는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요컨대 영화는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이라면 게임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입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그러한 게임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스토리 텔링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극 중 아서. 플레이어는 갱단의 ‘해결사’입니다. 무시무시한 총잡이죠. ‘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 묵묵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나서는 이가 됩니다.

게임 초반, 거액의 돈을 빚진 한 남자를 찾아갑니다. 여느 빚쟁이가 그렇듯, 없다는 돈은 쥐어짜내서라도 갚게 만들어야죠. 주먹으로, 발길질로.
게임 초반, 거액의 돈을 빚진 한 남자를 찾아갑니다. 여느 빚쟁이가 그렇듯, 없다는 돈은 쥐어짜내서라도 갚게 만들어야죠. 주먹으로, 발길질로.

 밖의 소란으로 나온 한 여자와 청년. 아마 빚쟁이의 가족인 듯 합니다. 자기 남편이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네요. 내 알 바인가요, 빌린 돈은 갚아야죠. 화가 안 풀려 주먹 찜질 좀 더 해줬더니 그걸 못 참고 내 얼굴에 피를 토하네요. 얼굴에 튄 빚쟁이의 피를 닦고 최후 통보를 한 채 갱단으로 돌아갑니다.

 무자비함, 강력함. 나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서에게도 시련은 찾아옵니다.

 조직의 리더 ‘더치’가 언젠가부터 이상합니다. ‘큰 한 탕’ 몇 번이면 우리 갱단들 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며 큰 소리 떵떵 외치더니, 이제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자꾸만 자기 말만 따르라는 둥 독단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 덕에 현상금도 잔뜩 걸리고, 떠나온 촌동네 갑부들 등쳐먹다가 또 쫓기고, 설상가상으로 하자던 은행 강도 짓거리는 수틀려서 또 또 쫓깁니다. 난리 판국에 아끼는 동료들을 잃은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최악은, 내가 결핵에 걸렸다는 거겠죠.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빚쟁이가 내 얼굴에 토해낸 피. 아, 죽어가고 있다던 빚쟁이의 아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나보네요. 내가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만들어낸 나의 파멸. 회한이 밀려듭니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더치는 아직도 돈이 부족하다며 또 수금을 해오라네요. 어쩌겠습니까. 가야죠. 하지만 이제 빚쟁이들한테서 뜯어내는 돈도 다 어디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빚쟁이의 집을 나오는 길에 매춘부가 보이네요. 잠깐, 목소리도 얼굴도 좀 낯익습니다. 죽어간다던 빚쟁이의 아내였습니다. 경제활동을 할 지아비가 없어졌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워야겠으니 짜낸 고육지책일 터.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선행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까지는 아닐지라도 이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이렇게 내가 만들어낸 타인의 파멸까지 보았습니다. 이제 나는 변해가는 조직에 계속 충성하며 손에 ‘피를 묻히는’ 더러운 일을 계속 해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이렇듯 나, 아서는 게임의 진행에 따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에는 조직과 자신만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점차 변해가는 갱단의 분위기와 주변의 사건과 인연을 통해 그의 가치관은 점차 바뀌는데요. 특히 급격히 나빠지는 그의 건강 상태, 다시 말해 아서 스스로가 자초한 자신의 처지가 맞물려 그의 내면의 변화를 나타내는 데 큰 몫을 합니다.

 또 하나의 역할을 하는 것은 게임의 시스템입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는 중 선행을 하면 선행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가령 구걸하는 부랑자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기부한다든가, 길 가던 중 곰 덫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사내에게 독한 위스키 한 병을 건넨다든가 하는 일을 말이죠. 반대로 악행을 한다면 그 업보라도 되는 듯 악행 게이지가 차오릅니다. 이유 없이 재미로 동물을 쏴 죽이는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른다든가, 열차 강도를 성공시킨다든가요. 이런 일은 당연히, 순전히 플레이어인 나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요소는 게임 스토리 상 맞을 수 있는 결말이 나뉘는 중요한 분기점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택지가 생기면 생겨날수록, 플레이어는 점차 ‘악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삶을 바꿔 써내려 갈 것인가’와 같은 중대한 인생의 문제를 직접 푸는 당사자가 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닌, ‘내가 아서가 되고, 아서가 내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레드 데드 리뎀션 2>은 플레이어이자 게임 캐릭터의 인간적인 면과 내부적인 갈등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게임 시스템 상으로 좌우되는 이야기의 역동적인 변형으로써 플레이어 각각의 개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게임의 후반부는 최후의 여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서는,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 결정해야 합니다. 도저히 긍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끔찍한 일을 마주해야 하지만, 또 나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까요? 아님 애써 외면하며 원래부터 살아오던 삶으로 이 거친 생을 끝맺을까요?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 걸까요? 저는 그 질문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누구도 나 대신 받아올 수 없으며, 운명이라는 것은 선택과 그 결과에 지는 책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말해줍니다. 피(Red)와 죽음(Dead)을 가까이한 사내가 스스로를 구원하는(Redemption) 이야기를 통해서요.

+

 앞서 선택의 결과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저는 아서에게 동이 터오는 아름다운 산을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찾으려 최선을 다한, 한 인간을 존중하는 맘으로요.

나 흔들리지 않고 서있을 수 있을까 May I stand unshaken

이 부서지는 세상 한가운데서 Amid, amidst a crashi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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