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터에서 혐오의 표현이 어떻게 한 사람의 존재를 초라하게 하는지에 관하여
심의위원회 소명의 자리에 들어오는 그녀는 벌써 눈시울이 붉었다.
형식적 절차로서 소명과정이고 서면으로 내용은 모두 확인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꾹꾹 천천히 내뱉는 말 속에 물기가 가득했다. 말을 고를 때마다 숨을 고르고, 감정의 파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목소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저는요… 아침마다 울면서 절 붙잡는 아이를 떼어놓고 출근해요. 그 아이한테, 엄마는 일하러 간다고, 멋진 어른이 되러 간다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제가… 회사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특히, 제 아이에게요.”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소명 절차 과정에서 당사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 않는 습관이 있다.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 지 양 측의 이야기를 드라이하게 듣는 것이 덕목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진술을 듣고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피해자의 입에서 ‘부끄럽다’는 말을 듣는 것은 생소하다.
본 건은 본인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안다. 그럼에도 그 단어는,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사람처럼, 그녀의 어깨를 구부려 놓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녀가 던진 질문은, 사회 전체의 거울 같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다른 누군가의 양심이 대신 짊어지고 있는 풍경.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부끄러움을 잘못된 방향으로 보내고 있는가.
그것은 가장 깊은 곳, 즉 어머니로서의 자기 존재와 아이에게 했던 약속이 파괴된 데서 오는, 파산 선고와 같은 부끄러움이었을까.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나왔는데, 이 지옥에서 너를 지키지 못하고 내 자신이 굴욕스럽게 되는구나.' '내가 너에게 정당한 노동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해왔으나, 너를 떼어 놓고 출근한 일터의 상사는 고작 나를 성적인 농담거리로 취급하는 곳이구나.'
아주 상식적인 삶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비루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무너졌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가장 먹먹하고 참혹한 감정의 진술이었다.
행위자는 알까. 그녀가 진술한 부끄러움의 갈래를, 공적 영역에서 존중받지 못한 구성원으로서 버틴다는 것의 감정을.
많은 경우 내가 가진 자원이 많을 수록, 내가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을 수록 우리의 발언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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