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렇게 저작자의 권리가 없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스페인의 히트작 <종이의 집> 작가가 한국의 저작권 현실에 대해 던진 말입니다. 에스더 모랄레스 작가는 “그런 권리 인식이 없는 나라에서 내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며 유감을 표했는데요, 한국의 저작권 보호 현실이 어느정도 길래 이렇게 이야기한 걸까요?
<검정고무신> 이우영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유
뾰족뾰족한 잔디모양 머리를 한 기영이 캐릭터는 우리가 어린 시절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보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어릴 적 친구였던 기영이를 처음 만화로 그린 이우영 작가에게 기영이는 자식 같은 존재였대요. 자식처럼 키워낸 캐릭터가 수십년 간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만화로 성공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이우영 작가는 그가 30여년 간 그려온 만화를 둘러싼 분쟁 때문에 괴로워하다 지난 3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우영 작가는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활용해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을 만들 수 있도록 제작사와 사업권을 나눠가진 이후, 캐릭터 상품 등의 2차 저작물 제작을 두고 제작사와의 갈등에 시달렸어요.
작품의 주인은 작가? 제작사?
원저작물을 활용해 제작사가 사업을 하는 데에 원작자가 ‘걸림돌’처럼 여겨지는 일은 현행 웹툰 업계에서도 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가 웹툰의 저작권 지분을 갖는 형태의 계약이 업계에서 전형적인 것이 됐어요. 웹툰의 수익을 분배하기로 한 비율대로 제작사에 저작권을 양도하고, 지분이 많은 쪽이 마치 주인처럼 사업을 주도합니다. 최근에는 제작사를 작품의 공동저작자로 지정해달라고 하는 계약형태도 등장하고 있고요.
제작회사도 저작권 갖는 것이 웹툰 업계 표준
이처럼 제작사가 저작권을 차지하는 형태가 업계 표준이 되어버린 현상을 창작자들은 우려하고 있습니다. 작가마다, 작품마다 계약의 세부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창작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계약형태가 아니라는 점은 동일하거든요. 회사가 원작자로부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저작권을 가지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원작자의 권리는 줄어들겠죠.
내 저작물로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창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제작사와 함께 콘텐츠 사업을 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동등한 위치에서 ‘윈윈(win-win)’하기에는 창작자와 제작사와의 관계가 너무나 비대칭적이라는 문제가 있어요. 일단 창작자는 제작사가 얼만큼 돈을 쓰고 얼만큼의 수익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작품의 저작권을 나눠 가졌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그 제작사와 같이 일을 해야 하죠. 제작사와 문제가 생기면 향후 작품활동에 큰 제약이 생기니 회사가 불편해 할 일을 만들지 않게 돼요. 정산서를 요청하기도 힘들고, 받는다고 해도 그게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법무팀을 갖추고 있는 큰 회사를 상대로 작가 개인이 법적 공방을 벌이는 것도 어렵고요.
영상 저작권, 작가·감독이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
영상 업계 또한 저작권을 제작회사가 갖는 관행 때문에 감독·작가와 같은 창작자들이 영상의 유통과 수익배분 과정에서 소외되는 문제를 겪고 있어요. 특히 최근 OTT 산업이 발달하고 다양한 유통 채널이 등장하면서 영상 제작사들이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저작권을 양도한 감독·작가는 이러한 이익 구조 속 일원이 아닙니다. 전세계에서 인기를 얻으며 1조원 이상의 수익을 냈다고 알려진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도 제작 당시 넷플릭스가 저작권을 독점했어요. <오징어 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은 “보통 창작자들이 작품 계약을 할 때 ‘저작자가 제작자에게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조항이 있다. 모두가 그랬기에 나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하나 보다 싶었다”며 개인으로서 그런 관행을 깰 힘이 없었다고 말했죠.
저작권 양도 계약, 과연 공정했을까
창작 기회가 절실한 감독, 작가들은 영상 제작 계약을 맺을 때 협상력이 약합니다. 신인이 아닌 이미 이름을 알린 창작자들도 다음 작품을 만들기까지 수년 간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 향후 작품 유통 계획이나 예상 수익 등의 정보를 가진 제작자와 그러한 정보가 없는 창작자가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창작자들이 계약 당시 저작권을 양도하며 지급받은 대가와, 나중에 실제 영상 저작물로 인해 발생한 수익 간의 괴리가 너무 커지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어요.
해외에선 저작자가 정보공개·추후보상 요구 가능
창작자들이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고 있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추가보상청구권’을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작자가 저작권을 양도한 대가로 받은 보상이 제작자가 얻은 이익보다 현저히 적어 불공정할 경우, 정당하게 보상을 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거예요.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는 이미 저작자가 정보제공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와 계약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제화하고 있거든요. 유럽연합의 ‘디지털 단일시장 저작권 지침’에도 추가보상청구권과 정보제공청구권이 2019년에 신설되었고요.
저작물을 활용해 제작회사가 어떤 수익을 얻었고, 이 수익이 원작자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었는지 가려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면 창작자들의 기본권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보장될 거예요. 하지만 수익의 격차가 어느 정도여야 불공정한 계약에 해당하는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두고 분쟁이 폭발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옵니다. 창작자 개개인이 법적 공방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까지 고려한다면 처음부터 저작권 양도가 불공정하게 이뤄지지 않도록 계약 관행을 개선하는 정책적 노력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제작사의 권리가 된 ‘저작권’, 원천적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을 알아보고 투자를 한 뒤 작품을 널리 알려줄 수 있는 제작사의 존재는 창작자에게도, 콘텐츠 이용자에게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제작회사의 힘이 너무 커져버려서 창작자가 자유롭게 창작할 권리와 창작활동에 따르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마저 크게 제약받고 있죠. 우리나라 웹툰 산업의 매출 규모가 1조 5천억원이 넘어갈 만큼 업계가 성장했지만 작가들의 자살, 과로사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창작자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생’ 없이 커져버린 업계가 창작자들의 목숨마저 위협하고 있어요.
원래 저작권 개념은 예술가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제 저작권을 뜻하는 ‘copyright’가 제작사의 권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하고 있어요. 창작자의 권리인 ‘author’s right’를 보장하는 변화가 시급한 상황이죠. 저작권의 원천적 주인이 누구이며 그것이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참고문헌]
박제웅. 2023. <만화·웹툰·산업 저작재산권 양도계약의 제도개선 과제>. 국회입법조사처.
공익법률센터 외. 2023. <창작노동의 정당한 보상 정책토론회 자료집>.
경향신문. 23-03-27. <내가 그린 웹툰을 회사가 맘대로?···공정위 시정 권고에도 ‘지재권 양도’ 계속>.
경향신문. 23-04-03. <비극 부른 검정고무신 ‘저작권 분배’···웹툰 업계에서도 ‘시한폭탄’>.
경향신문. 23-04-03. <“웹툰 수익배분 비율대로 제작사에 저작권 양도...창작 동력 갉아먹어”>.
오마이뉴스. 23-05-08. <매출 규모 1조 5천억... 하지만 웹툰작가는 웁니다>.
중앙일보. 22-08-31. <넷플릭스서 못 받은 ‘오겜’ 저작권료 시즌2는 받아야…천만감독들 국회 간 까닭>.
SBS 연예뉴스. 23-02-09. <'오징어 게임' 황동혁, 저작권법 개정에 목소리 낸 이유 "산업의 선순환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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