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정부가 2024년 예산안을 발표했어요. '문재인 정부가 푹 빠졌던 재정 만능주의를 배격하고, 건전재정 기조로 전환했다'며 홍보했죠. 정부는 '선거 매표용 예산, 이권 카르텔 예산을 과감히 삭감해 23조원을 아꼈다'며 자랑하고 있지만 곳곳에선 꼭 필요한 예산이 갑자기 사라졌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정부가 나라살림을 제대로 꾸리고 있는 게 맞을까요?
역대급 긴축, 원인은
내년 예산안은 '20년 만의 고강도 긴축재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총지출 증가율을 2.8%로 억눌렀는데, 재정 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래 가장 낮은 증가율이기 때문이에요. 물가가 3%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러한 총지출 증가율은 사실상 정부지출의 축소를 뜻해요. 정부는 '지난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 맬 수밖에 없다며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수가 부족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역대급 '세수 펑크' 때문에 역대급 긴축 재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죠. 내년 내국세가 1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국내외 경제여건이 악화되면서 세금 수입이 줄어든 것이 주요 원인이에요. 그런데 정부가 법인세 감세를 시행하는 것 또한 세수 펑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세수결손 심각한데... 이 시국에 대기업 법인세 인하
윤석열 정부는 대기업이 가장 이익을 보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추진하다 국회에서 막히게 되자, 대기업 투자세액공제를 확대했어요. 그 결과로 내년 국세감면액이 가장 크게 증가하는 세목은 법인세가 될 거래요. 심지어 국세감면에 따른 수혜가 대기업에 집중되고 있어요. 지난해 통합투자세액공제금액을 보면 총 2조 2천억원에서 1조 4천억원을 대기업이 가져갔어요.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 위기 국면에서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단기적인 감면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세수 결손이 심각한 상황에서 대기업에 돌아갈 것이 명백한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건 맞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가장 큰 타격은 어디로?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 맨 분야는 어디일까요?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가장 눈에 띄게 감액된 분야는 지방정부와 R&D라고 해요. 세수에 펑크 난 금액이 59조원인데요, 이 중 약 23조원은 지방정부가 부담해야 할 구멍이에요. 지방정부가 쓸 수 잇는 돈이 줄어들면 그만큼 지역의 살림살이나 여건이 악화될 수밖에 없어요. 비수도권 지역은 특히 더 어려워질 겁니다. 지역 불균형 현상이 가속화될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강화해주는 연구개발 분야에도 우려가 쏟아지고 있어요. 정부는 내년도 국가 R&D 예산 총액을 올해 대비 16.6% 삭감하여 예산안을 발표했습니다.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인 과학기술 연구분야가 즉각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와요. 신진 연구자들의 성장 발판이 무너져 인재가 해외로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도 크고요. 이번 예산 삭감 대상으로 오른 '기초연구사업'을 보면 투자한 예산 대비 논문수가 전체 사업 평균의 5배에 달할 정도로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는 사업입니다. 성과측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은 다른 사업들도 무분별한 삭감 철퇴를 맞아 과학기술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금융위기에도 한 적 없는 R&D 예산 축소, 그런데 SOC 예산은 늘린다고?
우리나라는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분류한 이래 단 한번도 R&D 예산을 축소한 적이 없대요.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R&D 예산은 삭감되지 않았어요. 국가의 미래에 정말 중요한 투자이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와도 건드리지 않았던 거겠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산을 삭감하는 와중에 SOC 예산은 크게 늘어 의아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예산안에는 얼마전 크게 논란이 됐던 서울-양평 고속도로의 설계비가 남아있고, 예비타당성조사에서 탈락한 지방 공항 사업의 예산도 포함됐대요. 나라살림연구소의 정창수 소장은 "(SOC 예산의) 내용을 보면 주로 항공과 철도, 항만에서 증가했는데 가덕도와 서산공항 등 지역에서 이슈가 되는 사업들이다. 내년 총선을 의식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어요. 또한 "미래 투자인 R&D도 줄일 정도로 초긴축을 한다는 정부가 개발시대의 투자사업인 SOC를 늘린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위한 알뜰함인가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 매는 데에도 한계가 있잖아요. 전문가들은 세수가 역대급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국채를 추가로 발행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내년 재정수지 적자가 45조원에 이를 것이라는데요, '코로나 이전을 기준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던 적자규모'라는 비판이 나왔어요.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인 2019년에 문재인 정부는 '적극재정'을 강조했었죠. 그때 적자수준이 12조원 정도였는데, 내년 적자가 45조원이라면... 현 정부의 표현대로 '알뜰재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 맞나요? 대기업 입장에선 법인세를 역대급으로 줄여주었으니 알뜰한 정부라고 느껴질 수 있겠네요.
중요한 건 '재정의 지속가능성'
법인세 내리다 세수 펑크를 맞게 된 정부는 여전이 이전 정부 탓을 하며 '건전 재정'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해외에선 더이상 재정건전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요. 낡은 개념이라는 거죠. 나라살림연구소의 이상민 수석연구위원은 "해외에선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중요시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면 법인세 인하로 대기업에게만 혜택을 줬던 정책을 되돌려야 할 거예요. 그리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을 투자해야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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