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날은 유독 날씨가 궂었습니다. 당시 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 준비에 지쳐 있었는데요.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던 백수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서울 충무로의 한 영화관이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탓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극장에는 뜻밖에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관객들이 영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부터 ‘시네필’ 대학생들까지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하니, 가라앉아 있던 제 마음에도 활기가 찾아오는 것 같았죠. 기분 좋게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대한극장 66년 역사, 이젠 안녕
이렇듯 저마다의 추억이 깃든 충무로의 상징 ‘대한극장’이 개관 66년 만에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넷플릭스가 대표하는 OTT의 출현으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들면서 극장가에는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나마 대기업 계열의 멀티플렉스는 어려운 시기를 버틸 체력이 있었지만, 여력이 없는 작은 극장들은 폐업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죠. 대한극장도 끝내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고요.
꼭 한 시대가 저무는 것만 같은 씁쓸한 단면의 반대편에선 아이러니하게도 기쁨의 축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지난 5월 15일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2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겁니다. <범죄도시4>는 영화 <파묘>에 이은 올해 두번째 ‘1000만 영화’인데요. 지금까지 나온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한 2~4편이 모두 관객수 1000만명 이상을 동원하면서 ‘트리플천만’이라는 대기록까지 달성했습니다.
대기록 달성한 <범죄도시4>와 빈익빈 부익부
전세계 영화 산업이 전염병의 후유증과 뉴미디어의 등장에 고전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영화의 선전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범죄도시4>의 유례 없는 기록은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불거지면서 빛이 바랬습니다.
<범죄도시4>는 개봉 첫날인 4월 24일 2930개의 스크린에서 1만5674회 상영했습니다. 영화관의 전체 상영 횟수에서 한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상영점유율은 81.9%에 달했습니다. 이는 2012년 일일 상영점유율 집계를 시작한 이래 역대 최고 수치입니다. 올해 첫 1000만 영화인 <파묘>의 개봉 첫날(2월 22일) 상영점유율(46.2%)과 비교해도 1.8배 높습니다. 반면, 배정된 좌석 수에서 실제 관객 수가 차지하는 비율인 좌석판매율은 35.7%에 그쳤습니다. 상영관을 독식한 것에 비해 티켓 판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는 뜻입니다.
<범죄도시4>가 스크린을 대거 가져가면서 같은 시기 개봉한 다른 작품들의 상영 기회는 줄어들었습니다. 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황금시간대(저녁 6시~9시)를 <범죄도시4>가 모두 차지한 탓에 <스턴트맨>이나 <챌린저스> 같은 경쟁작은 평일 아침이나 심야 시간으로 밀려난 거죠. 범죄도시 시리즈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 입장에선 선택권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범죄도시4>를 관람해야 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극장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계 ‘수직계열화’ 악순환
<범죄도시4> 흥행이 소환한 스크린 독과점 현상은 대형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수직계열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기업이 영화의 기획→투자→제작→배급→상영까지 모든 과정을 전담하면서 특정 작품이 상영관을 독차지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텐트폴 영화(대규모 자본과 유명 배우들을 투입한 흥행 기대작)를 앞세운 ‘와이드 릴리즈(개봉 전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홍보한 뒤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배급 방식)’ 전략도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고착화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오랜 시간 한국 영화계의 고질병으로 자리한 독과점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소규모 배급사의 영화나 저예산·독립영화는 설 자리를 점점 더 잃어갈 겁니다. 그만큼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의 폭과 선택지도 좁아지겠죠.
영화의 다양성, 어떻게 보장해야 할까
그럼 스크린 독과점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스크린 상한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관객이 몰리는 주요 시간대에 특정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제도인데요. 가장 강력한 스크린 분배 정책을 시행하는 프랑스에선 8개 이상의 스크린을 보유한 극장에서 영화 한편이 일간 상영 횟수의 30%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크린 상한선이 있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초과분의 상영 회차는 전부 취소되거나, 극장 영업정지 조치까지 이뤄질 수 있다고 해요.
월정액을 내면 무제한 또는 월정액을 웃도는 영화 관람 혜택을 주는 ‘영화관 구독제’도 고려해볼 만한 대안입니다. 구독멤버십에 가입한 관객은 한달 안에 되도록 많은 작품을 관람하고 싶어할 겁니다. 관객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극장 역시 다양한 영화를 들여와 상영하려고 노력하겠죠. 이미 미국, 영국, 독일에는 영화관 구독제를 도입한 극장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에선 “스크린 독과점은 시장 논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가뜩이나 영화 산업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많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작품에 ‘올인’하는 게 잘못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큰 영화’에 스크린을 몰아주고 해당 작품이 흥행하는 사례가 쌓일수록 시장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제작사 입장에선 흥행 공식에 들어맞는 영화를 제작하는 편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일 테니까요.
장기적 관점에서 스크린 독과점은 결국 영화 산업 전체를 획일화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범죄도시4>가 불러온 논쟁이 단지 논란에만 그쳐선 안 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000만 영화’가 남긴 숙제, 이제는 해답을 써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