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흉기난동이 벌어졌습니다. 평소 층간소음으로 갈등이 있던 남성이 피해자들의 집 앞에 흉기를 들고 찾아와 문을 부술 듯이 위협했어요. 피해자 부부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안면마비, 대인기피증 등의 질병을 얻어 직장을 관두게 되었습니다. 일상이 망가져버린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엄벌해달라고 재판부에 17차례 탄원서를 냈지만 결국 집행유예 판결이 나와 가해자는 실형을 면했어요. 가해자가 이렇게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고 직전 기습적으로 냈던 형사공탁금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대신해서 받아주는 합의금, 문제 있다
형사공탁이란 피해회복 등의 목적으로 가해자가 돈을 법원에 맡기면 피해자가 찾아갈 있도록 하는 제도예요. 지난해 말부터 형사공탁특례제도가 도입되어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몰라도 공탁금을 낼 수 있게 되었죠. 기존에는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민번호 등이 있어야 공탁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 피해자가 신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종의 형사 합의금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제도의 도입 취지는 좋아 보이지만, 큰 문제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합의하기를 거부하는데도 일방적으로 가해자가 공탁을 하면서 재판에서 감형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요즘 유행하는 감형수법은 ‘기습공탁’
공탁으로 인해 형량이 낮아지는 사례가 다수 등장하고 있어요.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공탁금을 걸어 감형을 받게 될까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합니다. 피해자가 재판부에 의견서를 내는 등의 대처를 할 수 없도록 선고 직전에 ‘기습공탁’을 해버리는 것이 법률시장에서 하나의 기술로 자리잡았다고 해요. 피해자가 공탁 사실을 알고 나서 관련 서류를 발급 받고 대처를 하려면 며칠이 소요되는데 이러한 시간을 아예 빼앗아버리는 거죠. 형사공탁제도가 도입될 당시 이러한 악용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제도가 시행되어버렸어요.
피해자 의사표시도 무시하고 감형 판결
피해자가 공탁금을 절대 수령할 의사가 없고 그저 엄벌을 원한다는 의견을 밝혔는데도, 재판부가 이를 무시한 채 감형해준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어요. 작년 겨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9살 동원이가 학교 앞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난 사건 기억하시나요? 동원이 부모님은 선고를 4일 앞두고 가해자가 공탁을 했다는 안내 문자를 받았습니다. 변호인을 통해 공탁금을 절대 받지 않을 것이며 피고인의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1심 판결문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공탁 사실이 언급돼있었어요. 대법원 양형기준에 따르면 최대 12년의 선고가 가능했으나 피고인은 7년의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실형선고가 공탁금 3천만원에 집행유예로
공탁금으로 인해 실형이 집행유예로 바뀐 경우도 있어요. 한 여성을 스토킹하며 집안에 침입해 여성의 속옷을 들고 나체사진을 찍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1심에서 2년의 실형을 받았으나 3000만원을 공탁한 이후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피해자는 교도소에 있는 줄 알았던 가해자가 사회에 버젓이 나와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해요. 이 사건 역시 공탁금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인자로 반영했다고 판결문에 쓰여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특례제도일까요? 피고인 측 입장에선 이 제도를 ‘천사공탁’이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피해자를 위한 형사공탁제도로 바뀌어야
피해자가 공탁금을 수령하지 않고 소멸시효가 완성되면 공탁금은 국고로 귀속됩니다. 국가가 대신 돈을 챙기면서 범죄자의 형량을 깎아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전문가들은 일단 1차적인 책임이 재판부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피고인이 공탁금을 걸더라도,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시하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인자로 고려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을 수정하여 공탁 사실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인자로 반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것이 가능하려면 재판 과정 내내 피해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기습공탁’도 불가능하게 만들어야겠죠. 범죄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의사를 표현할 기회를 보장 받고, 그 의사가 판결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변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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