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뉴스
2026년 9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농인 공동체를 위한 문화·공동작업 공간을 세우자는 캠페인 DeafCity Hub가 출범했습니다. 9월 23일 세계 수어의 날을 이틀 앞둔 때였습니다. 캠페인은 이달 웨스트민스터 시의회, 옥스퍼드 스트리트 개발공사(Oxford Street Development Corporation)와 협력해 재개발을 기다리는 건물 한 채를 1년 동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도는 청력의 상태를 가리킬 때 소문자 deaf를, 수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가리킬 때 대문자 Deaf를 씁니다. 이 글은 대문자 Deaf를 농인으로 옮깁니다. 한국의 한국수화언어법도 농인을 청각장애가 있으면서 농문화 속에서 한국수어를 일상어로 쓰는 사람으로 정의해, 청각장애인 일반과 구분합니다.
캠페인을 시작한 사람은 도시계획가 아만프릿 아널드(Amanprit Arnold)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했고, 보청기를 쓰다가 스물한 살에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으며, 장애인을 위한 환경 설계를 자문하는 회사 Disability Urbanism을 운영합니다. 목표는 농인 친화 건축 지침인 DeafSpace 원칙에 따라 건물을 짓거나 고쳐, 농인 공동체의 전국 단위 문화 거점이자 모임 장소를 세우는 것입니다. 농인 단체들이 입주할 사무 공간도 이 계획에 들어 있습니다.
이 계획에는 앞선 역사가 있습니다. 1986년 런던에 국제 농인 문화센터(International Deaf Cultural Centre)를 세우려던 계획이 있었고, 설계도에는 농인 역사 기록관과 극장과 전시 공간과 바와 조용한 방과 숙소까지 들어 있었으나 계획은 끝내 무산되었습니다. 아널드는 그 도면과 포스터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도면은 DeafSpace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으며, 이번 캠페인은 그 기준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곳은 1년 기한의 임시 공간입니다. 아널드는 이 공간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구상을 키우는 인큐베이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구 센터로 가려면 자금과 개발 파트너가 필요하고, 일이 잘 풀리면 런던의 공간을 국제 거점망의 시범 사례로 삼겠다는 구상도 함께 밝혔습니다.
2.공개된 설계 조건
DeafSpace는 미국 갤러뎃 대학교가 농인의 감각과 소통 방식을 기준으로 정리한 건축 설계 지침입니다(Bauman 2010). 보도에 적힌 원칙은 넷입니다. 영국 수어(BSL)로 대화하면서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넓은 복도와 계단, 눈의 피로를 막는 자연광과 부드러운 색, 시선을 트기 위한 유리와 거울의 배치, 여러 사람이 서로의 손과 얼굴을 볼 수 있는 원형 좌석을 들일 수 있는 방입니다. 아널드는 여기에 하나를 더했습니다. 농인 단체들이 쓸 회의실에서 직사각형 탁자를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가 9월 19일 소개한 원칙에는 보도에 없는 항목이 둘 있습니다. 투명한 재료와 반사와 진동으로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감각이 닿는 범위를 넓히는 원칙과, 화재 경보를 눈으로 알리는 체계입니다. 같은 원칙이 교사 설계에서 어떤 모습이 되는지는 미국 워싱턴주 농학교의 새 교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설계사 Mithun은 의도한 음향 진동으로 학생의 감각 도달 범위를 넓히고, 반사가 적은 유리와 유리 모서리를 쓰고, 교실 좌석을 180도 U자형으로 배치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건들을 한데 묶는 것은 아널드가 수어를 설명한 문장입니다. 원문은 “Sign language is not just spoken word translated into hands: it’s a rich, spatial language rooted in visual geography, 3D space and facial syntax”입니다. 수어는 음성 언어를 손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시각적 지리와 3차원 공간과 얼굴의 문법에 뿌리를 둔 공간 언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짧습니다. “It needs space.” 수어에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3.같은 사태를 네 자리로 다시 세운 표
M4는 경험을 네 자리로 나누어 읽습니다. 감각과 표현의 자원이 모드(Mode)이고, 그 자원이 실현될 때 걸리는 조건과 태도가 모달(Modal)이며, 둘이 결합해 정서와 행동과 정체성까지 아우르며 성립하는 총체적 경험 구조가 모달리티(Modality)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실현되는 환경적·기술적·사회적 기반이 미디엄(Medium)입니다. 넷은 한 방향으로 내려오는 위계가 아닙니다. 미디엄이 모드와 모달이 설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그 안에서 모드와 모달이 결합해 모달리티를 낳으며, 그렇게 생긴 모달리티가 다시 미디엄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순환을 이룹니다.

표를 자리마다 읽어 내려가면 네 자리에서 바뀌는 것이 하나의 전제로 모입니다. 대화는 소리로 성립한다는 전제입니다. 소리를 전제로 지어진 공간에서는 이 전제가 너무 당연해 조건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그 전제를 빼내자 복도의 폭과 탁자의 모양과 창의 위치까지 차례로 조건으로 드러났습니다.
4.Mode · 소리가 빠진 자리에서 다시 엮이는 감각
감각의 결합은 흔히 여러 감각 입력이 하나의 지각으로 묶이는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결합은 방향이 다릅니다. 한 감각이 빠진 자리에서, 남은 감각 자원들이 새 기준을 중심으로 다시 배열되는 과정입니다.
수어의 문장은 손의 모양과 위치와 움직임과 얼굴의 표정으로 이루어지고, 말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공간이 그 문장이 놓이는 자리가 됩니다. 이 조건에서는 빛이 조명 설비에 그치지 않고 문장을 읽게 하는 자원이 되며, 색은 손과 배경의 대비를 정하는 자원이 되고, 유리와 거울은 시야의 범위를 넓히는 자원이 됩니다. 소리를 전제로 지어진 공간에서 분위기나 마감재로 취급되던 것들이 여기서는 언어의 자원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진동은 이 배열에서 따로 볼 만한 자원입니다. 시선은 앞을 향하므로 등 뒤와 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은 눈으로 알 수 없습니다. 소리가 맡던 이 역할을 진동이 몸을 통해 넘겨받고, 반사와 투명한 재료가 시야를 넓혀 거기에 힘을 보탭니다. 청각 하나를 촉각 하나로 바꿔 끼운 것이 아니라, 시각과 공간과 진동이 역할을 나누어 청각이 맡던 자리를 함께 메운 셈입니다.
그래서 이 사례에서 Mode를 읽을 때는 자원의 목록보다 자원들이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묶였는지가 중요합니다. 소리를 전제로 지어진 공간과 DeafCity Hub가 요구하는 공간은 빛과 색과 유리라는 같은 자원을 씁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자원들을 한 묶음으로 엮는 기준이고, 그 기준은 다음 자리인 Modal에서 정해집니다.
5.Modal · 보여야 성립한다는 조건
DeafCity Hub의 설계 원칙들은 모두 하나의 조건을 공간으로 옮긴 것입니다. 대화는 서로의 손과 얼굴이 보일 때 성립한다는 조건입니다.
원형 좌석은 이 조건을 여러 사람의 모임으로 옮긴 것이고,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복도의 폭은 이동 중의 대화로 옮긴 것입니다. 직사각형 탁자를 없애는 결정도 같은 조건에서 나옵니다. 긴 변을 따라 사람을 일렬로 앉히는 탁자에서는 같은 변에 앉은 사람끼리 서로의 손과 얼굴을 보기 어렵습니다. 소리로 대화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던 배치가, 보여야 성립하는 대화에서는 대화의 일부를 끊어 내는 배치가 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보면 소리를 전제로 지어진 공간에도 Modal이 있었습니다. 소리는 등 뒤와 벽 너머로 닿으므로 대화가 시선과 상관없이 성립한다는 조건입니다. 이 조건은 명문화된 적이 없지만 복도의 폭과 탁자의 모양과 회의실의 배치를 오랫동안 정해 왔습니다. 아널드의 캠페인은 이 암묵적 조건을 다른 조건으로 바꾸자는 요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하나 더 있습니다. 누가 공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가에 대한 조건입니다. DeafCity Hub는 공동체와 함께 설계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내걸었고, 아널드는 이 공간이 농인이 소유하고 이끄는 예술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시성의 조건이 공간의 형태를 정한다면, 이 두 번째 조건은 그 형태를 누구의 기준으로 판정하는지를 정합니다. 원형 좌석이 어느 정도의 지름이어야 하는지, 빛이 얼마나 부드러워야 하는지는 그 공간에서 대화하는 사람만이 판정할 수 있습니다.
두 조건이 함께 걸린다는 데서 이 사례의 Modal은 설비 목록과 갈라집니다. 경사로나 자막 화면처럼 기존 공간에 덧붙이는 설비는 원래의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예외를 허용합니다. DeafCity Hub가 요구하는 것은 조건 자체를 바꾸는 일이고, 조건이 바뀌면 설비는 덧붙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배치로 스며듭니다.
6.Modality · 설계된 자리에 있다는 경험
아널드가 자신의 도시를 설명한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Nowhere in London is specifically designed for me.” 런던 어디에도 자신을 위해 설계된 곳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터뷰는 카페의 실외 좌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카페 안은 음향이 너무 나빠 밖에 있는 편이 훨씬 잘 들린다는 이유였습니다. 극장과 영화관의 통역 공연은 드물고, 있더라도 대개 사람들이 일하는 화요일 정오 한 회차에 잡힌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반대쪽의 경험도 있습니다. 아널드는 십대 시절 농학교에 다니며 농인 문화에 눈을 떴고, 그때를 두고 “Being in an environment that’s built for you is so important”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지어진 환경에 있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캠페인의 목적도 같은 말로 설명합니다. 원문은 “We have a really strong cultural identity element and we need somewhere to celebrate that, somewhere made for us”입니다. 공동체에 강한 문화적 정체성이 있고, 그것을 기념할 자리,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발언들이 가리키는 경험은 감각 편의를 더한 값이 아닙니다. 음향이 좋은 카페 한 곳이나 통역 공연 한 회차가 늘어난다고 해서 “나를 위해 설계된 곳이 없다”는 경험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 사례의 Modality는 자신이 그 공간의 기준인가, 예외인가를 몸으로 아는 경험 구조이고, 거기에는 소속과 정체성과 공동체의 기억까지 함께 걸려 있습니다.
아널드는 농인 공동체의 용어인 Deaf Gain도 언급했습니다. 농인을 결손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로 보는 개념입니다(Bauman & Murray 2014). 같은 원형 좌석이라도 청인 기준의 회의실에 하나 놓이면 배려 설비로 읽히고, 농인이 이끄는 공간 전체의 조건으로 놓이면 공동체의 자리로 읽힙니다. 모드와 모달이 같아 보여도 어떤 결합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성립하는 경험은 달라집니다.
7.Medium · 재개발을 기다리는 건물
이 사례에서 Medium은 건물이라는 그릇이 아닙니다. 도시가 비어 있는 건물을 누구에게 언제까지 내주는가를 정하는 제도, 그 결정을 내리는 시의회와 개발공사, 영구 센터에 필요한 자금과 개발 파트너까지를 포함하는 기반입니다. 1년 기한의 임시 사용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 기반의 한 부분이며, 그 형식이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먼저 정합니다. 벽을 옮기거나 창을 새로 내기 어려운 임시 건물에서 DeafSpace 원칙이 어디까지 구현될 수 있을지는 이 기반이 정하는 범위 안의 문제입니다.
기반의 역사도 여기에 속합니다. 1986년의 계획이 무산된 뒤 영국 어디에도 농인 예술을 위한 전용 센터는 세워지지 않았고,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농학교는 1980년대 초 75곳에서 지금 22곳으로 줄었습니다. 영국에서 청각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1,800만 명에 이르는데도 농인이 자신을 위해 지어진 환경에서 자라고 모일 기반은 오히려 좁아져 왔습니다.
이 사례가 순환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지점은 임시 공간의 역할입니다. 보도는 이 공간이 이런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준다고 적었습니다. 증명의 대상은 건물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임시 건물이라는 Medium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보여야 성립한다는 Modal과 수어의 Mode가 결합해 농인 공동체의 Modality가 한 번 성립하면, 그 Modality가 영구 센터와 국제 거점망이라는 새 Medium을 요구하게 됩니다. 캠페인이 1년 뒤에 내놓아야 하는 것은 이 순환이 실제로 돌았다는 기록입니다.
8.아직 말할 수 없는 것
공개되지 않은 것이 넷입니다. 임시 공간의 주소와 면적과 개관일, 설계 원칙 가운데 임시 건물에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항목, 영구 센터의 자금 규모와 개발 파트너, 이 공간에서의 이용 경험입니다. 지금 이 글이 Modality의 근거로 삼은 것은 한 사람의 과거 경험에 대한 진술이며, 이 공간에서 성립한 경험의 기록은 아직 없습니다.
논지가 약해지는 조건도 적어 둡니다. 임시 공간이 설계 원칙의 일부만 구현했는데도 이용자들의 경험이 기존 공간과 다르지 않다면, 또는 차이가 공간의 조건이 아니라 농인이 운영한다는 사실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면, 가시성의 조건을 이 사태의 중심에 둔 이 글의 해석은 그만큼 힘을 잃습니다.
소리를 전제로 엮여 온 도시의 공간에서 수어라는 Mode는 설 자리를 잃었지만, 서로의 손과 얼굴이 보여야 한다는 Modal로 빛과 시선과 동선을 다시 엮은 건물은 농인 공동체의 Modality를 가능하게 하는 Medium이 되고, 그렇게 생긴 Modality는 다시 영구 센터라는 새 Medium을 요구합니다.
참고문헌
Bauman, H. (2010). DeafSpace Design Guidelines (Vol. 1, Working Draft). Gallaudet University.
Bauman, H.-D. L., & Murray, J. J. (Eds.). (2014). Deaf Gain: Raising the Stakes for Human Divers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용어 농인은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 가운데 농문화 속에서 한국수어를 일상어로 쓰는 사람을 가리키며(「한국수화언어법」 제3조), 청각장애인은 청력에 장애가 있는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출처
The Guardian, 「‘Our culture is rich and we need our own space’: the fight to build a permanent centre for Deaf people」, 2026-09-21.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26/sep/21/deaf-city-hub-cultural-centre
Disability Urbanism, 「DeafCity Hub」. https://www.disabilityurbanism.com/case-studies/how-to-manage-a-business-as-a-working-from-home-mother-3w4sb-pmy4s
RIBA, 「A new voice in architecture: Deaf Architecture Front and DeafSpace Lab」, 2026-09-19. https://www.riba.org/news/a-new-voice-in-architecture-deaf-architecture-front-and-deafspace-lab/
Mithun, 「Washington School for the Deaf」. https://mithun.com/project/center-for-deaf-and-hard-of-hearing-youth/
「한국수화언어법」 제3조(정의). https://www.law.go.kr/법령/한국수화언어법
확인 날짜 2026-09-28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