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다운 집

[월간 사생활] 01. 나의 사적인 공간, 집

2021.03.22 | 조회 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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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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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집’은 재테크의 대상이자 힘든 하루 끝 편안히 몸 뉘일 수 있는 공간과 다름 없었던 것 같다. 천편일률적인 인테리어가 별 대수롭지 않았던 시절 아니었을까. 집은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닌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과 다름 없었을테니, 그저 누가 왔을 때 모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수더분하게, 그렇게.

누렇게 뜬 벽지가 창피하기도 하고, 비좁은 집이 더 비좁아 보이는 것 같아 도배 좀 하자는 둘째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늘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굳이 돈을 쓰냐’며 다음 번에 이사 가면 꼭 도배를 해주겠다고 약조하셨지만 친척들에게 받은 세뱃돈은 수금해 가시며 나중에 다 돌려주겠다는 공약처럼 늘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 역시 서운하지만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애당초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던 덕분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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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열세 평의 공간에 네 식구가 살았으니 그 안에 뭐 그리 꾸미고 살 여유가 있었겠는가. 형과는 늘 방을 함께 써야 했고, 남들 다 있다던 나만의 방이 난 늘 간절했다. 행여 형과 툭탁거리며 싸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비좁은 방이 더 좁게만 느껴지곤 했으니, 나만의 공간을 늘 꿈꾸곤 했다.

당시엔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불편한 것들만 가득찬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 점차 지나면서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행복한 유년시절이었다는 것. 화목했던 집안 분위기 덕에 비좁은 집엔 늘 웃음이 가득했다. 싸우지 않을 때 형의 존재는 내겐 더 없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늘상 가던 단골 떡볶이집, 공 하나면 밤 늦게까지 놀 수있던 동네친구들 가득했던 그 동네 그 시절이 난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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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내게 ‘집’은, 그리고 '집다운 집'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이의 존재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집이 강남과 판교, 혹은 한남동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그게 내게 1순위는 아니라는 건 내 유년시절로부터 체득한 선물과도 같은 경험 덕분이다. 지척에 편히 방문할 수 있는 단골 카페, 약속 없이 문득 신호를 보내도 삽시간에 모일 수 있는 동네 사람들, 함께 살을 부대끼고 사는 이의 존재와 더불어 내게 ‘집 다운 집’이란 이렇듯 ‘사람’으로 귀결된다.

나 또한 언젠가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군락과 촌을 이뤄 함께 마을에 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근거리에 함께 살며 충동적인 작당거리를 함께 의논하고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주거 형태가 어디 있을까.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꾸겠다. 그 꿈을 붙잡고 어떻게든 현실로 바꾸고자 노력한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에서 분명 무언가 또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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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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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트루의 프로필 이미지

    김트루

    0
    over 4 years 전

    저 역시 이번 글을 쓰며 '집다운 집'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집을 채우는 건 결국 가구보단 사람이더군요. 어떤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에 따라 그 집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이 원하는 '집다운 집'에 살기 위해 꿈을 꾸고 노력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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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이의 프로필 이미지

    조이

    0
    over 4 years 전

    시간이 지날수록 유년 시절이 기억이 오래 남는것 같아요. 저 또한 나이가 들수록 유년시절을 보낸 동내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네요..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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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영

    0
    over 4 years 전

    삶에 찌들어 있다가 소박하고 잔잔한 유토피아론을 읽으니 참 좋네요. 므두셀라 증후군 현상은 언제 접해도 신기하네요. 왜 힘들었던 순간이 그토록 아름답고 먹먹하게 다가오는 걸까요. 우리 모두 힘든 오늘이 어느 순간 내일의 강력한 동력원이 될 것을 믿고 힘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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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

    0
    over 4 years 전

    집에 대해 글을 쓰며 들었던 저의 생각과 비슷해서 놀랐어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들 크고 번쩍이는 집을 갖기 위해 다들 고군분투 하는 것이 제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작가님같은 사람들이 제 주변에 더 많아져서 생각으로만 꿈꾸던 그 작당모의를 실현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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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R

    0
    over 4 years 전

    저도 친한 친구들과 미래에 같이 사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앞으로는 그런 형태의 주거문화가 점점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유토피아가 그리 멀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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