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방으로, 방에서 '?'로

[월간 사생활] 01. 나의 사적인 공간, 집

2021.03.04 | 조회 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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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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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 째 엄마는 진노를 꾹꾹 눌러담은 문자를 내게 보낸다. ‘모두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집에 들어오라’ 고. 그리고 1년 째 나는 답하지 않는다.

3년 전 내가 가출, 아니 출가할 때만 해도 엄마는 비웃었다. 저 것이 6개월이나 버티면 기적이라고. 나가서 고생해야 집 소중한 줄 알 거라고 다른 가족들에게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사 제법 아늑한 옥탑방을 얻었다. 여름에 푹푹 찌기는 했지만 겨울에도 훈훈한 방이었다. 정남향이라 사시사철 햇빛이 쨍쨍히 비쳐 들었다. 집을 벗어나 방에서 살면서 몸과 맘은 퍽 건강해졌다. 이 시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다음과 같다. ‘천부인권 광복기’.

그 말인즉슨 그 이전까지 내 인생은 ‘천부인권 강점기’였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나는 왜 오빠와 내가 항상 다른 대접을 받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신물나는 남아선호도 그랬고, 육체에 대한 대접도 판이했다.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내 육체는 감시, 멸시, 등한시당하고 있었다.

아빠가 부재한 집구석에서 저녁이면 엄마는 란제리 차림으로, 오빠는 팬티 차림으로 집을 활보했다. 나는 최소한 반팔과 무릎 위까지 오는 바지를 입어야 했다. 대학 시절까지 치마 잠옷을 입고 자다 옷이 말려올라가기라도 하면 ‘음란하다‘며 폭언을 들었다. 내가 이 집의 유일한 미혼 여자니 몸을 곱게 간수해야한다는 명목이었다. 20대 중반까지는 여름에도 치마 밑에 스타킹을 신어야 욕설을 피할 수 있었다. 여자는 하체를 잘 관리해야 하며, 하체를 항시 압박해야 예쁜 다리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항상 마른 몸, 예쁜 얼굴, 빛나는 피부를 유지해야 했다. 오빠는 한 때 100키로 가까이 나갔지만 엄마에게는 잘 생긴 아들이었다. 엄마는 한 식탁에서도 오빠한테는 여자친구 사귀라고 성화고, 나한테는 처녀막 간수를 잘하라고 했다. 22살 때였나. 오히려 그 집구석에 대한 소극적 반항 차원에서 처녀막을 버렸다. 단 1초도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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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살 때 난 항상 아팠다. 몸도 마음도 다. 초등학교 때 평생의 지병인 소아질염을 얻었다. 엄마는 내 속옷을 보면 어린애 빤스가 왜이리 더럽냐고 욕을 퍼부었다. 입던 속옷을 옷장에 감췄다 매타작을 당하기도 했다.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한 탓인지 어른이 되고 석 달씩 항생제를 장복해도 차도가 없었다. 트라우마란 맘뿐 아니라 몸에도 새겨진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래도 어떻게 트라우마란 놈을 내쫓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빠르고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치유할 짬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대신 취직 후 차츰 일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이 사회가 허락한, 집을 멀리할 유일한 방편이었기에. 아침마다 출근하는 내 차림새와 몸매를 아래위로 훑는 집주인 시선만 견디면 좀 숨통이 트였다.

가출, 아니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란 2가지, 나의 불명예 퇴직과 엄마의 반포동 입성이었다. 4년 전 사내 성추행 피해자가 돼 공든 직을 잃었다. 업계 평판이 중요한 직군임을 악용, 가해자는 내 평판을 전방위로 망가뜨렸다. 2차 가해로 인해 이직에 줄줄이 실패하고 나는 경력단절녀가 됐다. 나는 날개가 꺾여 추락하는데 엄마는 훨훨 비상하기 시작했다. 땡빚을 끌어모아 반포동 소재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입주에 성공한 것이었다. 본인의 인생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며 그녀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녀는 카드 빚으로 70여인치 곡면 TV와 모션베드, TV 달린 냉장고부터 질렀다.

네 능력으로 어떻게 이런 데 살겠니? 부모한테 감사해라. 그녀가 입에 달고 살던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내게 그 집은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그 집은 지은지 40년이라 냄새가 구렸다. 모래 썩는 악취 속에서 벌건 녹물에 몸을 씻다보니 피부가 더러워졌다. 서울경부터미널 옆에 선 아파트라 공기 질과 소음 수준은 최악이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낮 없이 울려오는 사이렌 소음 역시 숙면을 박살냈다. 다 참겠는데 가는 귀 먹은 엄마가 70인치 TV와 그 우퍼를 내 방 벽에 붙여놓는 바람에 소음으로 정신병이 올 것 같았다. 때 마침 백수인 내가 가사 독박을 쓴 것은 물론이었다. 엄마는 원래 살림을 못 하는데다 편집증이 심해 가정부를 쓰지 못했다. 가족 구성원이 집안일을 해줘야 했다. 아무리 새로 도배해봤자 지은지 40년 된 아파트는 지저분하기만 했다. 2시간만 창을 열어놔도 바닥이 시커매지는 65형 아파트. 청소기만 돌려도 삭신이 쑤셨다. 부엌에는 엄마가 호더처럼 쇼핑해온 신선식품들이 쌓여있었다. 냉장고 두 대가 모자라 바닥에도 과일과 건조식품, 영양제가 즐비했다. 누군가 공들여 수확하고 채집하고 조리했을 음식들에는 먼지만 수북히 앉고 이윽고 쉬파리가 들끓었다.

집이라 쓰고 무덤이라 읽는 곳. 하루가 다르게 난 죽어갔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발했다. 한 번은 엄마가 일본 여행을 떠난 사이 남자친구를 불러 내 방에 같이 사진벽을 꾸몄다. 며칠 후 엄마가 돌아와서 쌍욕을 퍼부었다. 경비에게 내 행실을 낱낱이 들었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남사스러워 죽겠다며 엄마는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억울했다. 아파트 3층 사는 남자 고등학생은 허구헌날 여친과 손 잡고 다니드만. 물론 엄마 집에서 범죄라도 터졌다면 경비가 목격한 바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30대 미혼 여자가 남친 한 번 데려왔다고 부모에게 이르다니. 참으로 사특한 의도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경비에게 월급을 주는 ‘클라이언트’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고객이 왕 아닌가? 감히 월급쟁이가 고객을 음해하다니 이거 실화인가.

아하. 젠더권력은 자본권력마저 초월하는구나. 젠더약자가 짓밟히는 현장이 바로 망할 놈의 ‘집’이구나. 나는 대오각성하고 말았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그랬듯 대오각성한 자는 가출, 아니 출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가족 몰래 짐을 꾸리고 거의 야반도주하듯 나갔다. 방에 이사오자마자 가장 먼저 남자친구부터 불러들였다. 다이어트 강요하는 사람이 없으니 야식도 실컷 차려먹었다. 전신거울도 하나 사서 주말에는 혼자 패션 쇼도 즐겼다. 밤에 샤워하고 나서는 벌거숭이로 방도 활보하다 다리를 쫙 벌리고 가랑이도 말렸다. 몸이 건강해지면서 본능에도 봄이 왔나. 문득 섹스토이를 하나 샀다.

이렇게만 써놓으면 광복기가 아니라 방종기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자취하면서 아침에 몸 일으키는 게 가벼워졌다. 행동거지도 눈에 띄게 바지런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밥 먹고나면 바로 설거지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게임은 정해놓은 시간만 즐기게 됐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사니 주인의식은 절로 강해졌다. 무엇보다 수 년의 정신적 불임상태를 깨고 나만의 글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서글펐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누리는 천부적 권리들을 나는 투쟁으로 쟁취해야 했다는 사실이. 그래도 방에서의 삶은 자유롭고 충만했다.

그럼에도 자취 2년차에 돌입하고, 난 또 다시 출가에 목이 말랐다. 부정하고 싶어도 내 출가의 한계가 자명했다. 물리적으론 집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몸과 맘에는 동이 트지 않았다. 관리를 조금만 게을리해도 질염이 재발했다. 가출 3년차에도 엄마의 문자에 분통과 눈물을 터트렸다. 무엇보다 남자친구가 새 여자에게 떠나갔다. 사실 내 탓이 컸다. 인정해야 했다. 나조차도 버거웠던 어둠을 함께 맞섰던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별 후 반 년은 자다가도 남친에게 복수심이 들었지만 차츰 양가 감정의 격랑에서 벗어났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베트남 취업을 계획하며 나는 부던히 꿈꾸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그리고 집과 이어진 모든 카르마와 번뇌에서 해방되기를. 그 때서야 비로소 나의 출가는 완전해질 것이었다.

‘탈영토화’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내가 그 말을 만들었다면 ‘출가’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터부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며 집은 나가라고 있는 곳이다. 집에서 방으로 옮기면서 나는 젠더질서의 호명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다. 이제는 방조차 벗어나 미지의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카르마의 호명을 벗기 위해. 그저 아득하기만 한 순례길에 심지어 베트남조차도 환승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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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서영📓

    0
    over 4 years 전

    작가님 글을 읽다보니까, 여성언어는 그들의 건강에 대해 병으로 쓰는 답장일 뿐이다 라는 김혜순 시인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이 떠오릅니다. 출가일수도 가출일수도 있겠다던 작가님의 말은 정말로 집을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목소리가 향하는대로 나아가겠다는 말처럼 읽혔어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오죽하면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 한 권이 나왔을까요. 그 병이 얼마나 지독하고 자기 삶 가운데서 어떻게든 자기만의 방을 차지하고 싶으면요. 탈영토화라는 말도 잔다르크같고 너무 멋졌어요. 여러모로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김트루의 프로필 이미지

    김트루

    0
    over 4 years 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임에 분명해 쉽게 댓글을 달지 못했답니다. 작가님이 걸어오신 길을 짧다면 짧은 글로 날카롭게 때론 대범하게 때론 간절하게 써주신 것 같아 이 글을 읽는 저로선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성으로서 장녀로써 겪어야했던 자발적인 고통과 수동적인 메세지들을 앞으로는 현명하게, 그리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게 쓸 수 있는 힘을 길러보고자 합니다. 저야말로 서영님처럼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월간 사생활의 프로필 이미지

    월간 사생활

    0
    over 4 years 전

    글과 삶을 대하는 서영님만의 고유한 개성이 글에서 가감없이 드러나네요. '남들 다 그러고 사는데, 넌 왜 그러질 못하냐'는 세간의 평가나 (어찌보면) 억압과도 같은 환경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지키고 또 갈고 닦으시는 서영 님의 모습이 글을 통해 그려집니다. 창작을 통한 해소와 자유로운 세상으로의 유영, 글을 쓴다는 게 서영 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담겨진 글이라는 점에서 너무나도 재미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서영 님만의 고유한 개성 담긴 글들을 계속해서 읽고 싶네요.

    ㄴ 답글 (1)
  • JR의 프로필 이미지

    JR

    0
    over 4 years 전

    생각이 많아지는, 힘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고래의 프로필 이미지

    고래

    0
    over 4 years 전

    작가님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집에서 ?로, 길에서 집으로.. 끝없는 순환에 대한 고찰을 하게된 글이었습니다. 솔직하게 나눠 주신 글 감사해용..!! 앞으로도 주욱 잘 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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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NA의 프로필 이미지

    VANA

    0
    about 4 years 전

    서영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아버지는 팬티바람에 훌렁훌렁하는데도 샤워하고 여전히 축축한 몸에 옷을 구겨넣어 밀려오던 아픔이 떠오르네요. 저는 안타깝게도 아직 독립을 못했답니다. 가끔 엄마네서 훌렁훌렁하는 기분에 자유로움을 느껴요. 너무 오랜기간 상처받아온 서영님, 마음 속 깊은 트라우마와 번뇌에서 벗어나시길 응원할게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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