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면 되게 하라는데, 이렇게 됐네요.
벽에 바짝 붙어서 걸으면 둘레가 스물여덟 걸음 나오는 작은방.
‘내 방 여행하는 법’에서 저자가 자신의 방을 이렇게 소개한다.
‘벽에 바짝 붙어서 걸으면 둘레가 서른여섯 걸음 나오는 정방형의 방이다.’
이 표현이 너무나 좋아서, 나중에 내 방을 소개한다면 이렇게 표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기 전, 기다렸단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니 분명 친숙한 방이었음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다는 건 새롭다는 것이고, 새롭다는 것은 탐구해볼 만하다는 것이 아닐까.
모든 벽이 가구로 둘러싸여 있는데 유일하게 닿을 수 있는 벽이 있었다. 매트리스로 다가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윽고 폴짝 올라섰다. 평소엔 매트리스 상할까 봐 최대한 조심하며 지냈지만, 이 순간만큼은 중요치 않았다. 밟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는 발 때문에 구름다리를 걷듯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이 났다.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낯선 행동이었다. 어른이 되면 그런 것들은 다 재미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재미있네. 그동안 잠들어있던 장난꾸러기 세포들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맞아, 나 구름다리를 참 좋아했지. 플라스틱 삽과 곡괭이가 들어있던 빨간 바구니를 달그락거리며 놀이터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놀이터에서 흙장난이랑 소꿉놀이 참 많이 했는데.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좋아했던 많은 것들을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모든 것이 마냥 새롭고 즐거웠던 어린 날처럼 근심과 걱정 모두 내려놓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작은방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어떻게 하면 이 작은방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끝없이 고민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주어진 공간은 너무나도 작아서 주기적으로 한 번씩 가구를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최적의 배치를 찾아 나갔다. 그 결과 내 작은방은 주로 침실이었다가, 종종 서재가 되기도 하고, 때때로 작업실이자 놀이 공간이 되었다.
평소에 마음에 맞는 카페를 다니면서 커피 마시길 좋아했는데, 어느 정도 예쁘다 싶은 카페는 늘 만석에 그마저도 기다렸다 들어가 보면 좋은 자리엔 항상 사람이 있어서 기대했던 사진을 못 찍고 돌아올 때마다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웨이팅없이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음료를 즐길 수 있는 홈카페를 열였다. 마치 소꿉놀이하듯 예쁜 식기에 음료와 디저트를 올려놓고 여유롭게 카페에 온 듯한 기분을 내고 싶었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달랐지만, 홈카페를 하면서 무언가 집중해서 만드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을 떨칠 수 있어 좋았다. 집에서 무언가 만들어 먹는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어서 어설프고 서툴지만, 내게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만드는 과정은 사진보다 영상이 좋을 것 같아서 영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촬영을 하기 위해선 최소한 카메라 초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물러날 단 한 평의 공간이 절실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작업실을 얻을 자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어 방 한구석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좁은 방, 좁은 구석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책상과 침대 사이에 몸을 구겨 넣어 촬영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촬영하면서 매번 한계에 부딪쳤지만 외려 오기가 생겨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책상, 침대, 수납장, 바닥까지. 방 구석구석 어디든 촬영 장소가 되었다.
완벽하고 균형 잡힌 결과물이 목표가 아니었기에, 부족한 모습부터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기록해나가고자 했다. 처음 편집해 올린 영상을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지우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퇴근길에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들어와 촬영하기도 하고, 빵 굽는 날이면 방안을 가득 채운 버터 냄새 맡으며 잠들었다. 평일 밤낮으로 촬영하면서도 주말에는 어떤 걸 만들어 볼까 고민할 정도로 푹 빠져 살았던 것 같다.
편집할 때면 밤을 새는 날이 많았는데, 기절하기 전까지 편집하다가 영상 출력을 걸어놓고야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수정, 또 수정.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초반에는 컴퓨터 연식이 오래되어 영상 출력 시간이 4시간부터 시작해서 여름에 컴퓨터가 과열되기 시작하면 엄청난 소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내뿜어 8시간까지 늘어났던 적도 있다. 에어컨이 없던 때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고자 선풍기를 컴퓨터 쪽으로 틀어놓고 냉수마찰 후 잠을 청했다. 매일 땀에 젖어 끈적끈적한 몸으로 일어나도 출근길에 완성된 영상을 보다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언가 하나씩 만들어가는 희열과 의도한 대로 결과물이 나올 때의 뿌듯함을 느낄 때마다 홈카페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집은 나와 가까워지는 공간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마치 열기구처럼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은 비록 작은 방이지만 숱한 고민과 노력이 연료가 되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라 언젠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내 나이보다 적은, 고작 스물여덟 걸음 나오는 이 작은방에서 마치 여행하듯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탐구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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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한 평의 작업실 너무 부럽네요..! 나와 다른 집에 대한 생각에신기하고, 그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VANA
비좁지만, 저만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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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기성세대들은 우리세대가 너무 노력도 안 하고 꿈도 작게 갖는다고 하죠. 저는 오히려 우리 세대가 더 안분지족하며 자유로이 살아가는 거 같아 좋아요. 한 켠 방을 새롭게 정의하고 다채롭게 꾸미고 그 안에서 로망을 실현해가는 모습이 우리 세대답고 멋지네요.
VANA
우리 세대답다는 말이 참 듣기 좋은 것 같아요! 좀 더 개성을 갖고 나를 표현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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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
열기구 표현이 정말 찰떡이네요. 작은 공간에 대한 소개만으로도 작가님이 어떤 분인지 대략 느낌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
VANA
제 꿈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어요! 언젠가 날아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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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루
단 한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저는 방도 여동생과 나눠써서 저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한 지금 어쩌면 남들과 같이 있고 싶다가도 간절하게 혼자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고 저만의 취향으로 가득 메꾸고 ㅍ단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행복할까요 ㅎㅎ그런의미로 너무 부럽습니다:)
VANA
저도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혼자 방을 쓰게 됨으로 무언가 방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긴 것 같아요. 내 방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운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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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큰 공간이라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조금씩 넓었으면 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봐요. 저도 그렇거든요.. 한 평의 작업실에서 더 즐겁고 재밌게 살아보기위한 작가님의 노력과 삶에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따뜻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VANA
맞아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아마 넓었어도 만족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주어진 공간에 감사하고 나답게 살아보기 위해 또 즐거운 일들을 벌이고 있어요! jr님 말씀처럼 그런 일들이 저의 삶의 원동력인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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