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드 말고 미드요

[월간 사생활] 01. 나의 사적인 공간, 집

2021.03.08 | 조회 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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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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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외출복을 벗는다. 한 사람은 조명을 어둡게 낮추고 다른 한 사람은 퇴근길에 사 온 캔맥주를 봉지에서 꺼낸다. 절대로 겹치지 않는 동선 속에서 행동은 생각보다 빠르다. 그리고 둘은 빠르게 안방을 지나쳐 거실로 간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소파 양 끝 자리에 나란히 앉아 한 손엔 리모컨을 한 손엔 캔맥주를 든다.

“튼다?”

“응. 틀어.”

‘두둥.’ 익숙한 BGM과 함께 익숙한 빨간색 로고가 화면에 뜬다. 이어서 맥주캔 따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지고 두 캔의 맥주가 서로 부딪힌다. 더이상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지금 그럴시간 없다. 무드 말고 미드가 우선이다.

현재 세상은 크게 자발적 집콕과 강제적 집콕, 이 두 가지로 나뉜다. 본래 강하게 자발적 집순이었던 본인과 알고 보니 집돌이였던 남편은 제법 쿵짝이 잘 맞았다. 비록 집이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각자 하는 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코로나 시국을 맞아 우리의 집콕 라이프는 나름 굉장한 특기사항으로 변해있었다. 좀 더 슬기로운 집콕 생활을 즐기기 위해 고민하던 중, 우리는 역주행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드라마 정주행에 시동을 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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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우리의 일상은 신혼부부라는 말이 무색하게 지극히 무드보다는 미드 중심으로 흘러갔다. 퇴근 후, 저녁 먹을 준비를 마치고서 내뱉는 말은 “틀까?”, 저녁을 다 먹고 치운 후에 소파에 앉아서 하는 말은 “튼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서 하는 말은 “틀어?”

예전보다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애정전선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부는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어른들이 그토록 보지 말라던 텔레비전이 되었지만 코로나 시대에 살고있는 지금, 나름 꽤 모범적인 취미라고 혼자 자부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이런 내 생각을 툭 던졌는데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건네며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취미가 생긴 것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한다. 이 사람, 내가 듣고 싶은 정답만 이야기한다.

그날따라 유난히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딴 차가운 맥주 한 모금에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달까.

정신없이 정주행하며 달려온 지금, 총 시즌 12개인 미드의 마지막시즌에 이르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끝이 보인다는 아쉬움만큼 정신없이 달려온 이 드라이브의 끝이 궁금해 미치겠다. 오늘도 소파의 양 끝 자리에 앉아 리모컨이라는 차 키를 들고 거침없이 액셀을 밟는다. 어쩌면 요즘 내가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이 설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극히 쫄보인 내가 차마 회사에서는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혹시나 저에게 볼일이 있으시다면 퇴근 후, 늦은 저녁 시간에는 답장이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신혼부부지만 집에서 무드보단 미드를 즐기고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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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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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이의 프로필 이미지

    조이

    0
    over 4 years 전

    많은 시즌을 보셨다니 대단해요..! 전 요즘 뉴암스테르담 이라는 미드 보고있는데 뭔가 자극적이지 않으며 재미있어요! 조ㅁ스럽게 추천합니다:))

    ㄴ 답글 (1)
  • 최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최서영

    0
    over 4 years 전

    글이 안락하고 따스하네요 :) 집콕 기간에 활력소를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ㄴ 답글 (1)
  • JR의 프로필 이미지

    JR

    0
    over 4 years 전

    무드있는 신혼집이네요! 간결한 질문과 대답! 완벽한 저녁! 재밌게 읽었어요 :)

    ㄴ 답글 (1)
  • 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서영📓

    0
    over 4 years 전

    저희집이랑 똑같네요🤣 도입부에서 엄청난 긴장감이 느껴져서 뭔가 했는데 ,,, 영화 한 장면 같았어요. 집순이인 저로서는 요즘 유일한 낙이 넷플릭스 보는거 입니다. 사는게 별거 있나요. 다 그러고 사는거라고요. ☺️☺️💕

    ㄴ 답글 (1)
  • 월간 사생활의 프로필 이미지

    월간 사생활

    0
    over 4 years 전

    전반적으로 글의 구성이 매우 흡입력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드와 미드라는 운율과 어감 또한 고려하신 것 같아서 세심하게 디테일을 신경 쓰신 작가님의 정성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작가 님의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ㄴ 답글 (1)
  • 고래의 프로필 이미지

    고래

    0
    over 4 years 전

    ㅋㅋㅋㅋㅋㅋㅋ아....ㅋ을 남발해서 죄송해요 근데 작가님 글을 읽으며 큭큭 소리를 내며 읽었네요ㅠ_ㅠㅎㅎ. 보고계신 미드가 뭔지 궁금해지기까지했네요. 저는 드라마를 잘 못봐요... 왜냐면 이어서 보는걸 잘 못해서 항상 영화를 보거든요, 드라마에 한번 빠지면 정말 헤어나올 수 가없더라구요..ㅋㅋㅋㅋㅋ

    ㄴ 답글 (1)
  • VANA의 프로필 이미지

    VANA

    0
    about 4 years 전

    우와 리모콘이라는 차 키를 들고 거침없이 엑셀을 밟는다는 표현이 정말 신선했어요! 그리고 제목부터 마무리까지 너무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식간에 물 흐르듯 글이 읽혀서 제가 다 조급한 마음으로 글을 읽었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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