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욕심이 많았다.

할머니는 주는 것 보다는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2022.07.22 | 조회 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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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이의 썩 무던하지 않은 하루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

할머니는 주는 것 보다는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절에서 내려 온 파계승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도운 것인지 땅을 빌려 주고 소작농을 부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동네 사람들이 이것저것 들고 와 주는 것들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오빠나 남동생에 비하면 차별을 많이 받았다지만 그래도 마을에서 인정받는 집안의 딸내미였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남을 깔보고 부리는 것이 뼛속 깊이 습관처럼 굳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남편, 즉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기대와 달리 돈, 명예, 그리고 건강에는 큰 연이 없었나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다가 기구하게도 3남매와 두번째 시어머니 (본처의 아들인 할아버지를 미워한 할아버지의 새엄마)를 두고 일찍이, 그리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평생 일을 해 본 적 없던 할머니에게는 억척스럽게 돈을 아끼고, 에누리를 하고, 공짜 물건을 얻어 오는 것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돈 버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일 할 줄은 모르고 자존심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기 싫었던 할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다. 공부 잘 하는 할머니의 자랑, 큰 아들(우리 아빠), 큰 딸(고모)이 서울대에 붙었고 그 후로는 아들과 며느리가 모시고 살았으니 어찌저찌 살아졌나보다.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남녀 차별은 했지만 풍족했던 아버지, 돈도 없고 일찍 떠나버린 남편. 이 극명히 다른 두 남자를 아버지와 지아비로 겪으며 굳어진 성격이 아닐까. 

할머니는 욕심도 많았다. 한번 손에 쥔 것은 절대 놓지 않았다. 양 손 가득 뭘 들고 있더라도 공짜가 눈에 보이면 입을 써서라도 받아와야했다. 집에 파가 썩어나게 많은데도 동네 사람 파 농사 한 것을 달라고 떼를 써서 받아왔다. 우리 아들은 교수여, 우리 며느리도 서울대 나와서 박사 연구원이여, 하면서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면서 그런 행동이 아들과 며느리 창피한 일인줄은 몰랐다.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아들 며느리 돈 잘 번다고 말리니 이제 몰래몰래 했다. 남의 걸 또 싸워서 받아오거나 싸다고 잔뜩 뭘 사와서 옷장에 숨겨놨다가 그 안에서 썩어버린 적도 있다. 그렇게 남이 힘들게 농사지은 것들은 당연한 듯 받아오면서 엄마 아빠가 동네 분들께 명절선물 등을 챙기면 그게 아까워서 속이 썩었다. 해외 여행을 가서 뭘 사면 본인 것을 제일 좋고 비싼걸 사고 남들 선물은 항상 그보다 못한것을 골랐다. 

돈을 너무너무 좋아했지만 쓸 줄을 몰랐다. 그저 아빠나 고모들이 드린 용돈을 꽁꽁 모아뒀다. 욕심은 많은데 돈 버는 능력은 없다보니 쉽게 돈을 불리려다가 사기도 적잖이 당했다. 곗돈을 들고 나른 친구, 이자를 많이 준다기에 넣었는데 0원이 되어있던 통장. 잠이 잘 올리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자주 코를 골거나 잠꼬대를 했는데, 늘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받기만 하고 남한테 줄 줄은 모르던 할머니. 그래도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지갑이 열리는 때가 있었는데, 손녀 손자들, 그 중에서도 나와 내 동생에게 용돈을 주거나 뭘 사줄때였다.

"넌 왜 뭘 사달라고를 안해? 가끔 떼도 좀 쓰고 그래라 무던아"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9살의 나에게 할머니가 그랬다. 그제야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레고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주주인형도 갖고 싶었다는걸 깨달았다. 그렇게 나에게 주주인형이 생겼다.

할머니의 6칸짜리 옷서랍, 그 중 서랍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는 미국 간 큰 손녀를 위해 떠서 모아 둔 손뜨개 인형들이 나의 마음을 너무, 너무 아프게한다. 억척스럽고 고집스러운 할머니에게도 아낌없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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