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나리

[강나리와 김해경] 아자아자, 다섯

당신은 나를 잊었고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나 보다

2024.07.23 | 조회 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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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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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빵꾸]_강나리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날을 살아간다. 잡히지 않는 전파로 외계어 같은 잡음만 가득하던 세계의 전파가 조금씩 잡히고, 외계어는 조금씩 해석되어 선명한 주파수를 띤다. 더 젊던 날, 밤낮 없는 외계어로 골머리를 앓던 나는 얼마나 이런 날들을 고대했던가. 내 집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내 명치께를 쥐어짜던 가족도, 애인도 없다. 건강하고 안온하다. 잔잔하고 산뜻하다.

  당신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지부진 도무지 끝나지 않던 이별이 어떤 제도 아래서 끝났다. 건강, 안온 어쩌구는 무슨, 실은 나는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던 잡음들 속에서 사랑의 실마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하던 홀로의 나날들이었다. 당신 곁에서는 배불리 먹어도 찌지 않던 살이 이제는 몸살이 날 정도로 욱여넣어도 배가 차질 않은 지 오래라, 억지로 끄집어 홀로 돌돌 말아보던 과거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뚝 하고 끊어졌다. 당신과 헤어지고 지옥이 끝이 나는 줄 알았는데, 그 처참한 날들이 실은 내겐 천국이었단 걸 깨달아갔었단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당신은 나를 잊었고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나 보다. 그 사람에겐 나쁜 버릇 따위, 우울한 실수 따위 하지 않으리라 짐작이 된다. 반면교사 삼은 나와의 사랑은 어제로 남겨두고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릴 당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당신이 어제로 남겨둔 나날을 나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은 내게 사람이 아닌 사랑이기 때문이다. 멀어져야 하는 날이 다가왔을 때에, 나는 사람이 사람과 쉬이 멀어지듯 이별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진 길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건만, 쉬운 길을 믿는 사람이 기다려왔다는 듯 그렇게 걸어갔건만, 내가 만났던 것은 사람이 아닌 사랑이었기에 그 길에 끝은 없었다. 그 길이, 당신의 결혼으로 마침내 끊어졌다.

  먼 훗날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해야지. 결혼을 해서 이 긴 싸움을 끝내야지. 더 많이 행복하고 있을 당신을 따라잡야야겠다. 오늘도 이상형을 그리며 끝나지 않는 스스로와의 전쟁으로 뛰어든다.

[기다란 축복]_김해경

  서른이 되고 보니 나의 이십대는 기다란 축복이었다. 대학생 땐 글을 쓰고 싶어서 골목을 전전했었고, 대학을 나와서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전전했었다. 글과 사랑은 다른 게 아니라서 골목길에서 버진로드로 이어지는 이 밍숭함이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또 누군가에게 글과 사랑이란 "안온"한 표정으로만 지켜볼 수 없는 기다란 우울이기도 했나 보다. 나는 그 우울을 깊숙이 잘 알진 못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이렇게 비벼보는 것인데, 우울도 글과 다른 게 아니라서 내가 쏘다녔던 수많은 골목길의 한 갈래쯤엔 당신도 서 있을 거란 예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게 기다란 골목은 이십대였고 축복이었고 우울이었다. 그리고 "긴 싸움"이었다. 이젠 끝난 걸까? 그렇지 않다. 어떤 날에는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을 하염없이 걷는 꿈을 꾼다. 수십 채의 반지하 원룸을 지나도 끝나지 않는 골목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계속 걷느냐는 노인의 퉁명스런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끝이 없을 줄 알고 걷는 것입니다. 뿌리는 땅이 끝날 때까지 뻗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멀리 다녀와야 하는 건 인간의 운명인 줄로 안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이제 서른인데 아직도 헤매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동시에 도달했던 건 아직도 자라날 줄기와 잎사귀와 피어낼 꽃이 있다는 답이었다.

  계속되는 "싸움"

  골목을 헤매고 헤매다 마침내 마주한 동굴 앞에서 당신은 울고 있고 나는 손을 뻗는다. 글로서 움켜잡는 이 우울과 축복과 사랑. 보잘것없는 덩쿨로 만드는 숲. 당신의 요새였다. 

 

 


  • 아자아자! 힘낼 때 쓰는 말. 그리고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을 때 쓰는 말. 강나리 작가의 글은 때로 침묵보다 더 침묵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으로 와닿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앞으로 강나리 작가의 열혈한 독자가 되어 매번 리뷰를 할 생각입니다. 에세이와 리뷰. 새로운 방식의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물성과 해체를 찾아주세요. 새로운 연재, <아자아자>였습니다.
  • 강나리 : 식물학을 전공했다. 사람은 모두 얽혀 있고, 그 어디에선가 꽃처럼 사랑이 발생한다고 믿는다.
  • 김해경 : 물성과 해체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산문집 『뼈가 자라는 여름』(결, 2023)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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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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