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만귀정 원림 - 들어갈 때는 취하더라도 나올 때는 깬다
소박한 삶, 만귀정 원림을 거닐며 읊조리다
광주광역시의 서구 동하(洞荷)마을에 있는 만귀정(晩歸亭) 원림을 다녀왔다. 동하길 또는 세하동의 하(荷)는 연꽃을 뜻한다. ‘만귀정’은 저물어서 돌아와 원림을 경영한다는 말뜻이다. 장창우(張昌羽, 1704~1774)가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던 초막으로 시작하였다. 노년에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겠다고 지은 이름이다. 논어 선진편의 ‘욕호기풍호무우영이귀(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의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는 ‘귀(歸)’에 방점을 두어 명명하였다. 누정 원림을 경영한다는 것은 자연 강산에 노닐며 시를 읊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이 호응하는 조경 문화의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낮게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으면서 소요하는 ‘미음완보(微吟緩步)’와 논어 ‘영귀’의 생활은 맥을 같이한다.
만귀정 원림은 장창우의 후손이 선업을 이어서 1934년, 땅을 파고 연못을 만든 다음 파낸 흙으로 동산을 만들어 정자를 지으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춘다. 1,400여 평이니 제법 걸으면서 세심한 관찰과 알아차림의 정성이 깃들 수 있는 노닐만한 규모이다. 만귀정, 습향각(襲香閣), 묵암정사(黙庵精舍)가 일렬로 연못 중앙에서 다리와 섬으로 이어졌다. 중앙의 누정길이 연못을 2개로 나눈다. 태극 모양의 각 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약 10여 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동산이면서 섬이다. 각 섬마다 정자를 올렸다. 섬은 흙길로 연결하였다. 만귀정 원림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고풍스러운 목교 대신 세련된 석교가 주변 질감과 이질적이다. 다리의 규모에 비해 난간이 가분수처럼 지나친 비례를 보인다. 3개의 정자에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걸친다. 그때마다 시를 읊조리며 사색한다. 선계에 들었는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잊는다. 시간이 노니는 곳이다. 풍경에 취해 노닐다 퍼뜩 각성하는 일의 연속이다. 원림에 깃드는 동안은 사유와 언어를 버린다. 평범한 세상의 기록 방식으로는 남길 수 없다. 한가하게 이리저리 오고 가는 일만 무심하여 무위하다. 미음완보의 정서는 측정할 수 없다.
장창우가 지은 만귀정 「팔경」을 통하여 주변 주요 경관을 살핀다. “서석명월, 용강어화, 마산청풍, 낙포농선, 어등모운, 송정야설, 금성낙조, 야외장강”의 팔경에서 보듯이, 서석산(무등산), 황룡강, 백마산, 낙포, 어등, 송정, 금성산, 장강이라는 들과 산의 이름과 풍광이 나온다. 또한 「만귀정중건상량문」에는 극락강이 나타난다. 만귀정을 노래한 시문에서 경관 요소를 더 찾으니, 개금산, 전평제, 영산강이 출현한다. 팔경과 상량문, 시문 등에서 등장한 경관 요소로 만귀정 원림의 경관 요소로 비정한다.
만귀정에서 멀리 위요하며 감싸는 기운은 무등산과 금성산, 어등산(魚嶝山)이다. 황룡강과 극락강의 두 갈래 물이 합해져 영산강으로 흐른다. 목포까지 길게 흐르며 만귀정의 생기를 북돋는다. 만귀정 근처에는 백마산(白馬山)과 개금산(蓋金山)이 솟았다. 그 사이가 저수지인 전평제(前坪堤)이다. 장창우의 「팔경」은 만귀정의 초기 경관 요소로 지명을 활용하여 표상하였다.
만귀정 원림, 장안섭의 「원운」에서 찾다
지금의 만귀정은 돌로 단을 쌓은 위에 놓여 있다. 올려다보면 위풍당당하다. 처음 원림의 서막을 개시한 장창우 시대는 지금의 만귀정 원림과 달랐다. 기와를 올린 게 아니고 연못이 있던 곳도 아니었다. 장창우는 영조 시대를 살았다. 영조의 재위 기간에 세상을 깊게 보는 안목이 생겼다. 남원에서 이곳 동하마을로 이주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었다. 만귀정에서 읊은 시경(詩境)이 많았겠지만 「원운」이 전한다.
원림을 경영하는 목표와 방침을 숨김없이 시경으로 남겼다. 자신의 겸손을 소박함으로 대신한다. 둔질(鈍質)이란 노둔하여 아둔한 성질을 말한다. 아둔하다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는 말이다. 마음도 어리석고 밝지 못하다고 자신을 한참 낮춘다. 으리으리한 기와집 별서를 지은 것도 아니다. 서까래 몇 개 받쳐서 초막을 하나 만든다. 그래도 이곳 풍경은 기막히지 않은가. 어부의 피리 소리와 나무꾼의 노랫소리가 평화롭다. 찬 강과 갠 달처럼 내 마음도 하염없이 맑기만 하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떨어져 나와 농사를 짓고 있다. 이를 세상을 도피한다는 ‘피세(避世)’와 이름나기를 피한다는 ‘도명(逃名)’이라 하지 말라. 다만 너무 늦게 이곳에 온 것이 아쉽다.
어정어정 머뭇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눌러 있었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내리고 우물쭈물한 것이다. 이를 ‘서성거리다’라는 단어인 ‘반환(盤桓)’으로 시경을 전개한다. 세상의 실리에 밝지 못한 회의와 함께, 그래서 더 일찍 자연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신을 나무란다. 자연에서 소박하게 시를 읊으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게 만귀정 경영 목표이다. ‘반환’을 도잠(陶潛, 365~427)의 「귀거래사」에서 만난다. “햇볕이 뉘엿뉘엿 져서 장차 어두워지는데,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이네〔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그러니까 장창우는 ‘귀거래’의 마음으로 만귀정을 경영하며 실천한 것이다.
취석(醉石)과 성석(醒石)이라는 화강암 석재 벤치
만귀정은 1945년 광복의 해에 원림의 전체적인 형태를 드러낸다. 1934년 짓기 시작할 때,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이 쓴 「만귀정중건기」는 장창우의 7세손인 대섭, 안섭, 창섭 등이 부탁하여 작성한다고 기록하였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수월찮은 세월을 보냈다.
고광선은 근대 한학자로 광주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위의 중건기를 7월에 쓰고, 같은 해 12월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후손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배웠다. 고광선은 국권 상실의 암울한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역할로 후학을 기르는 일에 몰두한다. 고결한 인품의 근본을 맑음에 두고 이기적 탐욕을 멀리하는 선비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만귀정 축대 아래에 직사각형 화강암 석재가 벤치처럼 놓였다(평면 배치도-②). 잠깐 걸쳐 앉을만한 크기이다. 전통 조경에서는 석상(石床)이라 부른다. 넓적하고 평평한 돌을 정원의 한곳에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주변 경물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차를 끓여 마시고 바둑이나 장기를 즐길 수 있게 한 석물의 하나이다. 양면에 각자를 새겼는데, ‘취석(醉石)’과 ‘성석(醒石)’이다. 도잠의 고사에서 가져왔다. 바위에 앉아 술잔을 들고, 취하면 그 자리에 팔베개하여 잠든다. 청빈한 삶을 꿈꾼 자만이 설치하고 새길 수 있는 운치이다. 술에 취하였다가 술에서 깨어나는 간격이 너무 가깝다. 맞대고 앉은 두 사람의 등이 붙을 정도의 상판이다. 취하고 깨어남이 한 몸이다. 무지몽매와 깨우침이 등을 맞대고 앉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한순간이다. 연못과 나뭇가지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물고기 텀벙하는 생의(生意)의 소리를 듣는다. 낭창낭창한 가지는 얕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바람에 실려 흔들리는 자재로움을 탈속이라 읽는다.
흔들림에 편승하여 운율을 따르며 다가선다. 취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깨는 순간은 너와 내가 다르다. 흔들렸던 정서가 곧게 펴진다. 복잡했던 일이 단순해진다. 오랫동안 천착했던 삶의 비의를 깨닫는다. 화강석에 걸터 앉을 때 ‘취석’ 쪽은 만귀정을 마주하며 눈앞에 축대가 보인다. ‘성석’ 쪽은 만귀정을 대각선으로 등지고 습향각과 연못 경관에 놓인다. 원림을 따라 미음완보하며 걸을 때의 풍경은 반대이다.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갈 때 바로 보이는 게 ‘취석’이다. 원림의 꽃과 향기와 분위기에 취해 선계로 드는 중이다. 원림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만나는 게 ‘성석’이다. 선계에서 깨어나 속계로 나선다. 만취정 원림의 취석·성석은 선계와 속계를 퍼뜩 깨닫게 하는 구두선(口頭禪)이다. 고도의 정원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정원시설물이다.
만귀정 원림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다리가 있다. 청류교(淸流橋)이다(평면 배치도-⑥). 천천히 걸으면 두어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짧은 다리이다. ‘레고®아키텍처’처럼 작으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추어 깜찍하다. 맹랑하고 앙증맞은 다리이다. 다리 오른쪽 교명주(橋名柱)에는 ‘청류교’ 왼쪽에는 ‘무인앙춘묵암가설(戊寅仰春黙庵架設)’이라는 설명주(說明柱)가 있다. 묵암 장안섭이 1938(무인년)년 봄에 구조물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조상의 뜻을 이어 습향각을 짓는다
만귀정에서 다리를 건너면 연못 중앙에 습향각이 자리한다. 습향각이 세워지면서 연못 가운데 중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만귀정의 별당으로 지어진 누정이다. ‘습향’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장정섭이 지은 서문과 시에서 “종형 되는 안섭 씨가 여러 문중과 상의하여 이 누각을 선세의 누정인 만귀정 옆에 세웠다. 그 이름을 ‘습향’이라 한 것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자는 추모의 뜻으로 붙인 것이다.” 하였다. 누각 이름을 명명한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꽃향기가 엄습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주변 연꽃이 주인공이다. 습향각은 꽃향기에 취한 사방 한 칸의 정사각형 팔작지붕 누각이다. 세 명 정도 앉으면 적당한 크기이다. 「습향각원운」은 묵암(黙庵) 장안섭(張安燮)의 시이다.
肯構屬亭頭 긍구속정두 / 이 누각 만귀정 위에 기꺼이 지으니
兒孫日戱遊 아손일희유 / 아들 손자들이 날마다 즐겁게 논다
池荷開復落 지하개복락 / 연못의 연꽃은 피었다가 다시 지니
泚筆驗春秋 차필험춘추 / 붓에 먹을 적셔 봄가을을 증험한다.
-장안섭, 「습향각원운」, 박명희, 김대현, 『호가정 만귀정』, 심미안, 2019, 95쪽.
‘집터를 닦고 집을 짓는다’는 뜻으로 ‘긍구긍당(肯構肯堂)’이란 말이 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시작하고 자식이 이를 계승하는 것을 비유로 이르는 말이다. 속(屬)은 ‘무리’라는 뜻보다 ‘잇는다’, ‘따른다’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니 장안섭은 1구에서 ‘기꺼이 만귀정 위에 이어서 짓는다’라고 시의 첫 구절을 연다. 2구에서는 습향각이 후손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즐거움과 추억을 쌓아가는 특별한 공간임을 표상하였다. 정자가 가족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즐거운 놀이와 휴식으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3구는 연못의 연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통해 자연의 순환과 계절의 변화, 삶의 무상함과 자연의 생명력, 그리고 연꽃과 어우러진 습향각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다. 연꽃의 개화와 낙화를 통해 자연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하고 있다. 4구에서 ‘차필(泚筆)’은 붓에 먹물을 묻히는 것을 말한다. ‘험춘추(驗春秋)’는 오랜 세월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경험하고 관찰한다는 뜻이다. 붓과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내면의 성찰과 성장을 추구한다. 사방의 풍광이 붓을 들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습향각을 건립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의지가 엿보인다. 앞으로 내가 그랬듯이 후손들이 교류하는 모습을 꿈꾼다. 연꽃이 피고 지고 그림과 글을 통하여 예술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노래하였다. 서까래 아래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신철균과 남계룡의 「삼가 습향각 운을 따라 지음〔謹次襲香閣韻〕」이 걸렸다. 그 아래에는 친일행위를 알리는 단죄문이 세워졌다. 장안섭의 「습향각 원운」은 5언절구이다. 5언절구의 頭, 遊, 秋를 운자로 하여 7언절구로 「근차습향각운」을 지었다. 신철균과 남계룡의 시는 1941(신사)년에 써졌다. 당시 전남 내무국장이던 신철균은 풍년 오기를 원하는 시를, 당시 광주 군수였던 남계룡은 천봉만학을 임장한 파격을 표현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만귀정 시사’에 참여한 풍류객에 친일파도 있었다.
시대의 풍류, 한시 동인회 ‘만귀정시사’
만귀정 원림 앞에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있다. 오늘날 문학 동인이다. ‘만귀정 시사’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박장주(朴璋柱)이다. 박장주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에게 배운 문장가이다. 1938년에 만귀정에서 박창환이 박장주, 이회춘, 김병권, 박하형, 조병희, 이석휴 등과 결사를 조직할 뜻을 내비쳤다. 박창환이 제안자가 된다. 이윽고 1939년에 박장주가 주도하여 시사(詩社)를 조직하였다. 봄철에 한 번씩 만귀정에서 모여 시를 읊으며 노니는 결사이다. 이에 장씨 문중이 ‘만귀정 시사’ 결성을 후인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귀정 시사비’를 기념비로 세웠다. 지금까지 한국정원문화를 살펴볼 때, ‘시사창립기념비’가 누정에 세워진 것은 본 적이 없다.
만귀정 시사 창립기념비의 뒷면의 내용을 간략하면 이렇다. “서석의 서쪽에 만귀정 누정이 있다. 당시 시를 좋아하는 원근의 선비와 봄철에 한 번씩 시를 읊자고 하였다. 진나라 난정과 당나라 향산에 견줄 아름다운 광경을 재현한다. 이를 장씨 문중이 후대에 알리고자 기념하였다.” ‘만귀정 시사’의 의미를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난정곡수연’과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향산구로회’의 고사로 들었다. ‘난정곡수연’은 왕희지와 지인 42명이 곡수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지은 난정에서의 시 창작 모임이다. ‘향산구로회’는 나이 많고 벼슬 물러난 8명과 ‘향산거사’인 백거이가 만든 모임이다.
만귀정 원림의 세 번째 정자는 묵암정사(黙庵精舍)이다. 사방 1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정자는 광산 군민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독특한 유례를 지닌다. 멋진 편액이 눈에 띈다. ‘기장산하(氣壯山河)’이다.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글씨이다.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가,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수립 후에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은거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기장산하’는 기개와 기질이 마치 웅장한 산과 강처럼 드넓고 굳건하다는 뜻이다. 매우 당당하고 위풍당당한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애국지사, 또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인물을 지칭할 때 쓴다.
‘만귀정시사’는 일제강점기에 결성된 시 모임이라는 독특한 의미를 새긴다. 중·일 전쟁 이후 미곡 공출제, 식량 배급제, 국민 징용령으로 암울한 시대이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위축된 시기인 1939년에 시사가 결성되었다. 쉽지 않은 도모이다. 만귀정시사에 참여한 인원만 28명이다. 이들이 만귀정 시를 각각 한 편씩 남겼다. 이들 시는 장창우가 읊은 만귀정 「원운」의 운(韻)인 ‘명평청명정(明平晴名情)’을 차운한 작품이다. 이 중에서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의 내용을 작성한 송광세(宋光世)의 시를 읽는다.
晩來歸去古淵明 만래귀거고연명 / 늦게 다시 돌아온 사람은 옛날의 도연명이니
門柳庭柯一路平 문류정가일로평 / 문 앞의 버들과 뜰의 나뭇가지가 길가에 평온하다.
洞裏飛霞山欲曙 동리비하산욕서 / 골짜기에 노을 날아가고 산에는 새벽이 밝아오니
簷前細雨野初晴 첨전세우야초청 / 처마 앞에 가는 비와 들판에 갠 뒤의 맑은 풍경
篤於孝友猶遺法 독어효우유유법 / 부모께 효도하고 형제 우애 독실해 가법을 지키고
樂以漁樵不願名 락이어초불원명 / 낚시와 나무 하는 일을 즐기며 명성을 원치 않았다.
舊址新亭開且感 구지신정개차감 / 옛터에 새 정자 열고 감회에 젖어 한가하니
朝先心是子孫情 조선심시자손정 / 조상에 대한 마음이 바로 후손들의 정서라네
-송광세, 「근차만귀정운」, 박명희, 김대현, 『호가정 만귀정, 심미안, 2019, 142쪽.
한국정원문화의 시경(詩境)을 보면 원림 경영자의 시를 원운으로 하여 차운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해서 이번부터 연작시집 '시의 풍경을 거닐다'에도 차운시를 실험적으로 도입한다. 광주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만귀정을 배경으로, 내면 심리와 주변 풍경을 아름다운 차운시로 묘사한다. 만귀정에 올라 ‘상우(尙友)의 만남’을 위해 잠시 선정(禪定)에 든다. 그들의 숨결을 되새기며 "밝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는 단순히 빛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문화유산을 이어받아 널리 알리겠다는 다짐이다.
만귀정 누마루에 올라
온형근
밝게 한다는 게 선조의 숨결을 새기는 것임을
내 평생 참으로 못나서 가까운 사람을 챙기지 못하네
팍팍한 가슴을 열어제껴 숨겨진 포부를 보여줄 수 없지만
만귀정 원림 한 바퀴에 울화는 비 갠 구름처럼 명랑하다.
조금만 이르게 돌아왔다면 왕버들 심은 뜻으로 사방 이름났을 텐데
함께 어울리며 잔잔한 정 버릴 수 없는 시절이 있어서
여태 흐뭇하고 들떴던 날들 뒤돌아본다.
하나도 긋지 못한 약속이어서 기어코 혼자 만귀정 누마루에 오른다.
배롱나무 먼저 꽃대 올려서 봉긋하여 움찔할 때
연꽃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 내밀며 수그러든다.
나야 아무렇지 않아 벙긋대며 피고 지는데
만귀정 연꽃은 푸른 잎으로 시치미를 뗀다.
-2023. 3. 15.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가까운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만귀정 원림에서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다. 울화가 차올랐던 마음이 비 갠 후의 밝은 구름처럼 맑아진다. 직관적인 느낌을 거닐면서 정화하며 속마음을 예리하게 관찰한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 “여태 흐뭇하고 들떴던 날들”을 회상한다. ‘흐뭇하다’와 ‘들뜨다’라는 감각적 어휘로 한 시절의 행복한 감성을 드러낸다. 만귀정의 아름다운 풍경도 놓칠 수 없다. 배롱나무가 먼저 “꽃대를 올려 봉긋하여 움찔”하면, 연꽃은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 내밀며 수그러든다.” 섬세하고 역동적인 꽃의 시절을 떠올린다. 생명력 넘치는 만귀정 원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스친다. “만귀정 연꽃은 푸른 잎으로 시치미를 뗀다”고 내 마음을 투영한다.
장창우의 만귀정 「원운」의 압운인 ‘明平晴名情’의 운자를 한글로 차운하여 시를 창작하였다. ‘밝게’, ‘평생’, ‘비 갠’, ‘이름났을 텐데’, ‘잔잔한 정’ 등이 그것이다. 「만귀정 누마루에 올라」는 만귀정 원림 공간을 매개로, 내면의 풍경과 바깥 세계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그린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우의 만남’을 꿈꾼다. 만귀정 원림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깊은 성찰로 접어든다. 원림의 풍광에 깊이를 부여한다. 원림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직관적 통찰의 시경을 자양분으로 공급한다. 원림과 시경은 동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으로 끈적끈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