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

시크릿 원림의 전형을 포항에서 만나다

019.포항 분옥정

2025.06.05 | 조회 273 |
from.
茶敦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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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분옥정 - 시크릿 원림의 전형을 포항에서 만나다

 

분옥정 만지송의 기억과 기록

반송(盤松, Pinus densiflora for. multicaulis Yueki)은 전체적인 수관 형태가 우산형으로 자란다. 식재 설계에서 단식, 열식, 교호 식재 디자인으로 활용된다. 수관이 서로 닿을 경우 수형이 망가지기 때문에 군식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잘생긴 수형 덕분에 지표 식재의 기능으로 사용된다. 지면에서 줄기가 많이 갈라져 자라는 특성으로 인해 만지송(萬枝松)으로도 불린다. 소나무의 늘씬한 줄기가 밑동에서 여러 갈래로 기품 있게 솟아 뻗는 자태가 만지송이라는 호칭을 부각시킨다. 이는 선비의 지조와 미학적 안목이 결합하여 지어진 고상한 이름으로 해석된다. 특히, 반송 대신 만지송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가 존재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북 영양 답곡리의 만지송이다. 또한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 앞에 거대한 반송도 만지송으로 불린다. 반송이 제대로 기품을 갖추었을 때 만지송이라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경북일보에 기획 특집으로 연재된 <[정자] 17. 포항 분옥정(噴玉亭), 경북일보 2016.04.29.> 기사의 사진은 특히 눈길을 끈다.

"분옥정 앞 계곡과 만지송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는 사진 설명글로 보아 이대까지는 만지송이 세력이 약해보이지만 생존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 : 경북일보에서)
만지송과 분옥정이 푸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청류를 사이좋게 나누는 풍광이 돋보인다. 아래 사진의 만지송이 위 기사의 만지송으로 변해가면서 결국 만지송은 고사하고 없어진다.(사진 : 포항의 빼어난 정자, 분옥정)
만지송과 분옥정이 푸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청류를 사이좋게 나누는 풍광이 돋보인다. 아래 사진의 만지송이 위 기사의 만지송으로 변해가면서 결국 만지송은 고사하고 없어진다.(사진 : 포항의 빼어난 정자, 분옥정)
분옥정을 마주보고 있어야 할 만지송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비어있다. (사진 :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분옥정을 마주보고 있어야 할 만지송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비어있다. (사진 :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포항 분옥정 개울 건너 암반에 뿌리 내린 만지송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다. 20248월 보물 지정 이후 분옥정을 찾는 방문객이 급증하였고 관련 탐방기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그 이전의 기록은 드물게 발견된다. 안타깝게도 현재 대부분의 탐방기는 만지송의 위치를 오인하고 있다. 특히 분옥정 입구의 '보호수 소나무'를 가지가 많다는 이유로 만지송으로 잘못 소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오해는 개울 건너 암반에서 자생하던 본래의 만지송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무의 복원은 다른 어떤 복원보다도 지극히 어려운 일로 평가된다. 나무는 그 자체로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2024년 제6'건축문화유산분과위원회' 회의록에서 2006331일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00년의 소나무를 만지송으로 잘못 지칭한 내용이 발견된다. 분옥정 문중에서 관리하는 소나무에 대한 각주로 "2006331일 시군나무 정자목으로 지정되었고, 수고 12m의 수령 415년을 넘긴 수많은 가지를 가진 소나무라 하여 만지송이라고 한다. 느티나무 보호수는 태풍으로 없어졌다고 한다."라고 달았다(회의록 168). 180쪽에는 분옥정의 정면에는 자연 계곡이, 배면에는 수령 415년의 소나무(만지송이라 지칭함)300년된 향나무가 위치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옥정 정면'이 계곡을 향하는 곳이고 향나무와 보호수 소나무가 위치한 곳이 분옥정 '배면'이다.

만지송의 위치는 2021년 『포항 분옥정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학술조사 용역』에서 소나무(만지송)’이라 애매하게 혼술(混述)한 보호수 관련 글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회의록에서 언급된 소나무는 원줄기가 뚜렷하게 올라간 풍만한 수관을 가진 일반 소나무로, 만지송의 특징적인 수형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오류는 2024829일 보물로 지정된 '포항 분옥정'의 제8차 건축문화유산분과위원회 회의록(7, 19)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기서 언급된 소나무는 만지송이 아니라 입향조가 심은 소나무로 분옥정 배면에 위치한 수령 약 415년으로 기재된 '보호수 소나무'이다.

분옥정 보호수 관련 소나무와 만지송의 애매한 기록 1
분옥정 보호수 관련 소나무와 만지송의 애매한 기록 1
분옥정 보호수 관련 소나무와 만지송의 애매한 기록 2
분옥정 보호수 관련 소나무와 만지송의 애매한 기록 2

「화수정송」에 담긴 만지송의 풍경 회고

분옥정 보물 지정 기념행사를 앞둔 날 분옥정을 방문하였다. 분옥정 원림은 경주김씨 돈옹공파 문중에서 경영하고 있다. 분옥정 관련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김수일님이 관리 대표자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를 한다. 주하(柱下) 김도희(金道喜, 1783~1860)의 화수정기 등의 기문과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1766~1840)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현판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게 분옥정 용추폭포 위 암반에 자생하던 만지송의 안부였다. 2015년 여름, 나무의 세력이 좋지 않아 방역을 한 업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로도 나무의 세력이 계속 좋지 않았다. 2016년도 입향 380주년 행사를 즈음하여 그 업자가 나무를 벌채하였다고 한다.

수세가 약했더라도 만지송은 보존해야 할 역사적 가치가 있는 나무였다. 김수일님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만지송의 크기가 그대로였으며, 당시 어른들에게서 수령이 300년은 되었음을 들었다고 한다. 암반의 열악한 토양에 천연적으로 씨가 날아와 바위틈을 파고들어 자리 잡은 후 오랜 세월 더디게 성장했을 것이다. 용추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며 푸른 생명력을 푸른 기개로 이어온 만지송의 세월이 상상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분옥정과 맑게 흐르는 청류(淸流)의 대화를 나누던 만지송의 자취는 기록으로나마 보존해야 한다. 이에 만지송의 푸른 기품이 담긴 사진을 찾아 분옥정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이 만지송은 김수일님의 어머니인 이원환(李源環, 1920~1992) 여사의 가사로 작성한 시 화수정송에서 문학적 소재로 다루어진 바 있다.

新羅千年 古都北一座名山 생겼도다. /一座名山 어디맨고 鳳溪一區 여기로다. /佳麗名山 살펴보니 屛山在北하고 /鶴山在東한데 兄山弟山 南望하니 /白水長江 빗겼도다 千里行龍 雲住山/腦髓에 비녀되고 鳳居大空 높은바위 /千年으로 솟아있다. 千年盤石 地礎된데 /無二九曲 깊은 곳에 檜巖亭을받아 /靑銅碧瓦 數三間할시고 景槪로다 /一長瀑布 廬山墆雷聲을 울려잇고 /거룩한 弘門淵破玉처럼 흩어지니 /噴玉亭分明하다 千流不息 잔잔소리 /游人應味眠하니 聽流軒確然하다 /金枝玉葉 鶴髮老人 碁局으로 消長하고 /二八靑春 少年들은 琴書消日 樂을 삼아 /咧泉尺地 淨化하니 花樹亭이 이 아닌가 /含前에 푸른莓笞 西蜀紫雲亭/이렇듯이 模範했고 庭園數植物/個個燦爛하다 花壇의 좋은 菊花 /重陽戱弄하고 數十丈 萬枝松/雲谷에 솟은 모양 舞鼓松盤桓하니 /陶淵明紫翠로다 層巖絶壁 爛漫花/四時따라 자랑하고 보기좋은 枕香木/入門香氣로다 南北探勝客/短杖을 떨쳐짚고 물물이 到着하니 /一好酒 接待하고 舊情年代 講論하니 /高曾租手足이라 이러한 後中先業 /日月같이 保管하고 廬山같이 尊奉하여 /芝宇萬歲 傳해보자 슬프다 우리 後生 /筆記로 다할손가 三綱宗婦 李源環/丁丑元日 吉日맞아 삼가 喜毫하노라 (이원환, 화수정송)

-고신문화유산(2021) 이원환, 화수정송」 『포항 분옥정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학술조사 보고서』, 70-71.

이 시의 화수정(花樹亭)이 지금의 분옥정이다. 4구체 향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유교적 교육을 받은 양반 계층의 작품이다. 분옥정의 장소성을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풍류로 읊었다. 경주 북쪽 운주산을 천 리를 뻗어 나가는 용천리행룡이라 묘사한다. 운주산 산맥이 길게 뻗어 있는 웅장한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내려와 머리에 꽂은 비녀처럼 높고 뾰족하며 봉황이 큰 하늘에 머무는’ ‘봉거대공으로 봉좌산꼭대기 바위의 솟은 모습을 형상화한다.

분옥정 주변의 깊고 아름다운 계곡을 무이구곡(無二九曲)으로 삼는다.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은 경관을 자랑한다. 계곡의 한 줄기 긴 용추폭포가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노산에 걸려 있다며 중국 노산의 폭포를 연상시키며 지오포니(geophony)의 경관이 연출된다. 용추폭포 아래 파인 암반의 못을 홍문연(弘門淵)이라 하였다. 폭포의 물방울이 깨어지며 떨어지는 모습을 파옥(破玉)처럼 흩어진다며 분옥정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힌다. 쉬지 않고 천 갈래로 흐르는[千流不息] 물소리로 경관의 생동감과 영속성을 시경으로 이끈다. 분옥정에 앉아 천류불식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聽流] 맛있게 잠드니[應味眠] 청류헌(聽流軒)’이라는 이름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분옥정에서의 행태를 보면, 나이 든 사람은 바둑, 젊은 사람은 거문고와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샘물이 솟는 작은 땅인 열천척지(咧泉尺地)’를 깨끗하게 한 이곳은 정원문화와 교양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정자 앞에 품고 있는[含前] 푸른 식물과 정원에 심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하나하나 찬란하다. 도연명의 시 음주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화단의 좋은 국화 중양을 희롱하고로 표상한다. 또한 귀거래사외로운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서성인다[撫孤松而盤桓]를 떠올리는 수십장 만지송도연명의 자취라고 인용한다. 운곡에 솟은 모양 무고송(舞鼓松)이 반환(盤桓)하니가 그것이다. ‘외로운 소나무를 쓰다듬는게 아닌 북춤 추는 소나무이다. 만지송의 한 줄기마다 이루어진 수관이 흔들리는 모습을 춤추는 북으로 볼 수 있다. 여러 줄기의 수관이 뭉쳐서 각자 따로 흔들리는 모습을 표상한다. ‘반환(盤桓)’은 어정어정 머뭇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일을 말한다. 만지송이 잡아끄는 매력을 반환이라는 말로 축약한다. 머무르고 서성인다.

분옥정의 풍류를 도연명의 [국화=유연견남산+만지송=무고송이반환(舞鼓松=撫孤松)국화+소나무=은일] 자취로 분명히 드러난다. 분옥정 앞은 겹겹이 쌓인 바위와 절벽이다. 사시사철 꽃이 활짝 핀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은 향나무를 지나 정자에 들어선다. 좋은 술 한 잔으로 옛정을 나눈다. 이 시의 마무리는 선조의 업적을 받들어 후손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분옥정이 만세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을 화수정송시로 남겼다.

분옥정 원림에서의 통감각적 경험과 그 함의

분옥정 원림의 다양한 통감각적 이미지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탐색한다. 봉좌산에서 내려오는 산세는 원경으로 보았을 때 크지 않지만, 이곳 분옥정에서 마주할 때에는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눈앞의 정면은 시각적으로 웅장하기 그지없다.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 봉좌산 기운이 단애취벽(丹崖翠壁)의 장대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전한다. 단애취벽은 산수 평론에서 푸른 암벽 경관의 극적인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언사로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단애취벽의 커다란 암괴는 자연의 기를 수신하여 내공을 함양하는 수련의 장이자 양생의 대상이 된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은유한다. 머리에 비녀를 꽂은 듯 높이 솟은 봉좌산을 과장과 은유로 묘사한다. 마치 멀리서 용이 움직이며 다가오는 듯한 모습이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존재를 연결하여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전통적인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분옥정 정자 마루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내 안의 감각이 활짝 열린다. 그 속에서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청각, 촉각, 후각 등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통합된다. 비밀의 정원처럼 숨겨 놓은 계곡이 아름답다. 좁고 규모도 작아 별거 아닌 듯 스쳐 지날 풍광이라 여겼으나 흰 물결 빛나는 굽이치는 긴 강처럼 역동적이어서 놀란다. 주희가 경영하던 중국 무이산의 굽이굽이 흐르는 무이구곡에 전혀 비견할 바 아닌 독창적인 계곡의 아름다움을 청각으로 들려준다. 흐르는 물은 끊이지 않고 천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물길을 따라 호쾌하고 명랑한 소리를 내며 폭포를 이룬다. 폭포의 길이는 짧지만 역설적으로 수림에 숨고 보여주며 길고 우렁차게 뻗었다. 폭포의 옥구슬이 부서지는 듯 흩어지는 모습이 정자와 협력하여 시원하고 빼어난 경관을 만든다. 폭포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는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단애취벽의 숲이 가까우니 나무가 풍기는 향기[沈香木]로 후각 또한 깊은 사유에 들게 한다.

분옥정 원림의 통감각적 경험은 노인은 바둑을 두고 젊은이는 풍류를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주변 환경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여유와 풍류를 담고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찾아온 손님 접대하며 교류한다. 풍류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원림의 가치를 일깨운다. 전통과 역사는 계승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후손에게 중요한 유산으로 남는다. 분옥정 원림 경영의 의미는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후대에 전하는 데 있다. 분옥정이 보물로 지정되기까지는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자 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마음이 분옥정을 단순한 경관을 넘어 한국정원문화의 정수를 대변하는 장소로 자리잡게 한다. 미래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미학의 가치를 전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전승된다.

분옥정과 청류헌 그리고 화수정과 용계정사

분옥정 정자의 현판 종류 - 분옥정 현판 크기를 기준으로 비율로 표기
분옥정 정자의 현판 종류 - 분옥정 현판 크기를 기준으로 비율로 표기

분옥정에 걸려 있는 현판은 추사와 유당, 농차의 글씨이다. 분옥정(噴玉亭)과 청류헌(聽流軒)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화수정(花樹亭)과 용계정사(龍溪精舍)는 유당 김노경의 글씨이다. 유당은 추사의 생부이다. 과천 과지초당이 추사의 생부 김노경의 별서이다. 그리고 치동마을 입향조 8세손인 농차(聾此) 김정환(金鼎煥, 1874~1969)의 글씨가 천지재(天止齊)이다. 분옥정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폭포가 보이는 정자’, 청류헌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집’, 화수정은 일가 간의 화목’, 용계정사는 물이 흐르고 있는 형상이 용을 닮은’, 천지재는 하늘처럼 높은 뫼에 지은 집이란 뜻을 가진다.

하나의 정자에 아버지와 아들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 매우 드문 사례가 분옥정에서 나타난다. 화수정과 용계정사에는 낙관이 있고, 분옥정과 청류헌에는 없는 대신 분옥정 현판 후면의 기록에 참판 종친 정희씨가 청류헌과 분옥정을 썼다.”[因參判宗正喜氏書出聽流軒噴玉亭]고 하였다. 1828년 무자년에 서울에서 글씨를 직접 받아서 경주에서 판각하여 이듬해 정월 10일에 걸었다고 입향조 8대손인 농묵(聾默) 김상기(金相琦, 1781~?)가 기록하였다.

편액은 화수정기1827, 1844년에, ‘화수정추운1870년에, ‘돈웅정기1887년에 작성되어 걸렸다. 1844년의 화수정기는 주하 김도희의 문장이다. 분옥정 주변에 위치하는 산과 계곡의 풍광과 화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봉좌산의 독특한 모양과 특징을 엄연하게 거인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우뚝하게 서 있는것으로 묘사한다.[鳳坐巖儼然所巨人頂帽特立者]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산의 형상이 잘 그려져 있다. “물이 폭포로 흘러 용추가 되고 푸른 언덕이 병풍같이 굽이굽이 둘러있어 사람들이 감상과 살펴볼 만한 곳이다.”[爲暴淮而爲湫蒼崖翠屛曲曲可人點檢]라 하였다. 이곳 정자의 위치는 용추 바로 위 석벽에 세웠으며 따뜻한 방과 대청은 검소하나 시원하다고 하였다.

주하의 화수정기는 이곳 분옥정 원림이 일가친척이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며 거문고를 타며 정담을 나누는 문중 모임의 특별한 장소로 기술한다.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는 순간이 기쁨과 행복의 활동이다. 옛사람들은 가족 친지의 화목을 펴는 모임의 뜻을 화수(花樹)라 하였다. 화수에 대하여는 1827년 동래 부사 지암(芝菴) 윤경진(尹景鎭, 1760~?)이 때문에 위원외화수가의 뜻을 취하여 정자에 이름을 짓고 형제간에 즐거움을 말하였다.”[是以取韋員外花樹歌之義而名其亭]고 또 다른 화수정기에 정자 이름이 왜 화수정인가를 밝혔다.

今年花似去年好去年人到今年老
始知人老不如花可惜落花君莫掃
君家兄弟不可當列卿御史尚書郎
朝回花底恆會客花撲玉缸春酒香
올해 꽃은 작년처럼 아름다운데, 작년의 사람은 올해가 되어 늙었구나.
비로소 알았네, 사람이 늙어감이 꽃만 못함을, 안타깝게도 떨어진 꽃을 쓸지 마오.
그대 집안의 형제들은 비할 데가 없어, 고관대작들이 되었구나
조정에서 돌아와 꽃 아래서 늘 손님을 맞이하니, 꽃잎이 옥술잔에 떨어져 봄술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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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삼, 위원외가화수가<출처 https://zh.wikisource.org/wiki(2024.11.6.)>

위 시는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 715~770)이 지은 위원외가화수가이다. 잠삼이 좌습유(左拾遺)에 제수되어 장안에 갔을 때 본 장면을 시로 지었다. 원외랑(員外郞)으로 있는 위씨(韋氏) 집안의 친족들이 꽃나무 밑에서 매번 즐겁고 단란한 모임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위원외가화수가(韋員外家花樹歌)를 지어 찬양한 것을 말한다. 후세에 친족간의 모임을 화수회라고 부른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주하의 화수정기를 보면 정자 이름을 화수라 짓고 천 리 길 서울로 달려와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유당에게 편액 글씨를 청하고 내게 정자의 기문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종친이 천 리 먼 길을 달려와 현판은 유당에게 편액은 주하에게 청한 광경이 보통 정성스러운 게 아니다.

분옥정은 돈웅(遯翁) 김계영(金啟永, 1660~1729)의 덕업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김종한(金宗漢, 1761~1843)을 도감으로 삼아 1820년에 건립하였다. 초창 기록은 계정경기록(溪亭經紀錄), 1820에 그 내용이 상세하다. 문중 아우가 터 잡고 살던 곳인데 일가가 의논하여 정자를 짓기로 하고 문중의 재정으로 화목을 위한 화수(花樹)의 장소로 삼았다. 건립 당시 벌목, 수장, 운목 등 도움을 준 문중 인물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부터 대청과 온돌이 결합된 평면도상으로 정()자형 형식의 건물이다. 분옥정 앞 계류를 바라보는 3칸의 누마루와 누마루 뒤로 온돌방 2칸을 배치한 평면이다. 돈옹은 세속의 번다함을 씻는 여울이라는 뜻의 세이탄(洗耳灘)을 바위에 새기고 유혹을 물리치며 공부에 매달렸다. 후학을 지도하는 정사의 역할로 용계정사로 불리었다. 용계정사는 이곳을 후학을 가르치는 학문의 장소로 공공의 선을 추구하고자 건립한 취지를 나타낸다.

세이탄과 돈웅 김계영

수없이 이곳을 거닐었던 돈옹을 따라 걸으며 나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암반으로 흐르는 좁은 계곡의 세이탄 암각을 교훈으로 삼아 용계천을 거슬러 수없이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거닐었을 일상이 떠오른다. 숙종대의 허적으로 대표되는 남인의 실각과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의 등용이었던 경신환국(1680), 장희빈의 등장과 서인의 몰락, 남인이 권력 회복인 기사환국(1689), 장희빈의 폐비와 서인의 재발탁 정국인 갑술환국(1694) , 세상의 혼잡함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은거하는 선비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경신환국이 일어난 해에 돈옹이 지은 시를 읽으며 그 시절의 대의를 느낀다.

幽禽雲竝宿 고요한 곳의 새가 구름과 함께 잠들고
淸澗月同流 맑은 시내의 물 달과 함께 흐른다.
獨夜彷徨久 홀로 밤을 헤매며 오래도록 방황하니
誰知我思悠 누가 나의 깊은 생각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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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영, 돈옹공 유시비」 『포항 분옥정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학술조사 용역』. 102쪽.

김계영의 호는 돈옹(遯翁)이다. 달아날 자와 늙은이 자를 사용하였다. 환국의 시대에서 멀찌감치 물러앉았다. 세상은 권력을 향하여 거침없는 숙청을 단행한다. 함께 경륜을 나눌만한 좋은 친구는 자연의 순리에 놓였다. 돈옹은 자연의 고요함과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용계천과 세이탄의 풍경 체험을 떠올리면서 감정의 깊이를 시에 담는다. , , 달을 통해 고요함과 외로움을 표현한다. 간결하고 직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유사한 음절의 반복으로 리듬감을 부여한다. 개인의 내면적 갈등과 고독감이 '누가 나의 깊은 생각을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묻는다. 벼슬하여 정계에 나갈 생각을 접는다. 후학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세이탄 - 자료 : 포항 분옥정 학술보고서, 133쪽
세이탄 - 자료 : 포항 분옥정 학술보고서, 133쪽

세이탄은 돈옹의 선비 정신을 압축하여 주는 상징적인 표상이다. 지금은 글씨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학술조사 용역 (2021) 보고서에는 마모된 글씨 부분을 적색 글씨를 입혀서 실었다.

분옥정 협곡을 노래하다

분옥정을 참 귀하게 만났다. 완전무결한 비밀의 정원이다.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게 어른거린다. 규모보다는 짜임새의 빈틈없는 갖춤에 탄복한다. 짐작하건대 자연 지형을 제대로 살피고, 원림 적지를 선정하여 경영하는 것은 당대의 필요 불가결한 지식이며 교양 필수에 해당하는 교과였으리다. 기막힌 입지를 찾아 정자 하나로 완벽하게 비밀의 정원을 경영하였다. 단순한 풍광이 아닌, 주변 환경과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향이 빚어낸 특별한 공간이다. 분옥정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이다. 작은 세부 요소 하나하나가 이곳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한 경험을 시경으로 하나 남긴다.

분옥정 협곡

온형근

 

 

분옥정 정면으로 층층 쌓은 책을 닮은
물길 건너편 벼랑바위는 닿을 듯 가깝다.

흐르는 협곡 큰 바위 사이로 물줄기 떨어질 때
온몸으로 보듬다 튕겨 내는 물보라가 있어
책 바위를 놀라게 하더니 얼굴로도 아차 싶게 닿는다.

정자 뒷문으로 들었다가 앞쪽 난간에 나서면
한 눈에 오밀조밀 다 갖춘 분옥정 협곡으로
걸어내려 간 그이는 물안개에 휩싸였을까.

손 내밀면 갑자기 악수할 벼랑에서 툭 튀어나와
언제 남이었을까 싶은 허물을 벗는다.
펼친 대하소설 수 백 질을 누마루에 펼친다.

-2024.07.03.

분옥정 정자에 오래 서성이며 이 시를 떠올렸다.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에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다. 주변 풍광을 바라보며 장면마다에 눈을 감고 머릿속에 담는다. 책을 쌓은 듯한 벼랑바위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협곡의 물줄기가 큰 바위 사이로 떨어질 때, 그 물보라가 몸을 감싼다. 힘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물보라가 얼굴에 닿는다. “얼굴로도 아차 싶게 닿는순간이다. 순간의 감동이 전신에 퍼진다.

정자의 뒷문을 열고 정자 마루를 서성이다 난간에 선다. 협곡을 한눈에 바라보며 풍경에 매료된다. "오밀조밀 다 갖춘 협곡"이다. 세밀함이 모여 자기들끼로 어울리는 앙상블(ensemble)이 뛰어나다. 시간차로 물안개에 휩싸인 신비로운 경치가 전개된다. 환상적인 시의 경지에 든다. 벼랑과 마주하며 속삭임으로 동기화를 시도한다. 손 내밀면 벼랑에서 누군가 말하자고 나설 것 같은 느낌이다. 세월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아무 때고 언제 남이었을까 싶은 허물을 벗는정원이다. 머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분옥정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겪는다.

한국정원문화가 주는 평온 속에 대하소설 수 백 질을 분옥정 누마루에서 읽는다. 고요한 숨결 속에 과거와 오늘이 교차한다. 벼랑과 물줄기가 그렇게 어우러져 속삭인다. 분옥정은 아름다운 경관을 넘어서는 문화유산이다. 삶과 자연이 교감하며 만들어낸 지혜와 가치가 응축된 공간이다. 인류는 생존의 기술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과 인간다움에 대한 통찰을 문화적 형태로 전승해왔다. 분옥정 역시 이러한 문화적 DNA인 밈(meme)을 품은 장소이다. 후손에게 인간적인 가치를 전하는 역할을 해왔다. 인의예지성경의는 물론 검소, 겸양, 공도(公道), 성찰, 우애, 자강, 청렴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구체적 가치라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로운 증험은 성스러운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분옥정과의 연결은 다시 찾고 싶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茶敦])

『월간::조경헤리티지』은 한국정원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당대의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습니다.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짧은 단상과 긴 글을 포함하여 발행합니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설계 언어를 창발創發합니다. 진행하면서 더 나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생산하면서 주체적, 자주적, 독자적인 방향을 구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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