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기 시작했나보다. 뭘 해야하나?! 뭘 해야하지?! 고민하다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버린다. 내가 여기서 관광객으로 누릴수 있는건 이미 다 해보지 않았던가? 두오모 성당을 입장하기 위해 이 무더위 속에서 줄을 서기엔 인내심이 충분하지 않고, 나를 위한 쇼핑은 영 흥미가 솟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수작들을 보자고 하니, 구름같은 인파 생각에 머리가 아파 차라리 마트에 들러 이탈리아 간식을 쓸어오는게 행복하겠다 라는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마트로 향하는길에 마주친 수많은 외국인들은 오늘도 삼삼오오 모여 두오모 성당을 향하고, 나는 그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향한다는게 참 기분이 좋다. 시간에 대한 자유로움을 허락받은 기분이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커다란 마트를 유유자적 뒤적인다는게, 묘하게 피렌체 로컬인들과 소속감을 공유하는 기분이요, 밖의 여행객들과는 차별성을 두른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프로세코 가스 와인과 신선한 과일들을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와 빈둥거리다 보면 생기넘치는 나의 시간이 돌아온다. 6시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대리석의 열기가 잦아들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여행가들은 한점에서 만난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일몰을 보며 각자의 하루를 주황빛으로 수놓는것이 피렌체 여행의 핵심 이벤트이자 여행도감록에 도장을 찍는일. 어떤 이는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팍에 기대어 피렌체 건물들에 걸리는 태양을 즐기고, 어떤 이들은 불량한 자세로 걸쳐앉아 대마초를 피우며 광장을 탁한 연기로 자욱하게 만든다. 이 시간이 지나면 피렌체는 어둠에 휩싸이고 싸구려 주황빛 조명들이 하나둘씩 켜지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간대이다. 바와 레스토랑은 시원한 음료로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길가에 하나 둘 모여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로 소리를 채워낸다. 관광지에서 여행하는게 아니라 식사를 하거나 각자만의 시간을 이 좁디좁은 도심에서 행하니 관찰할것들이 투성이다. 어떤 골목을 걸어도 새로운것 투성이며 목적지 없는 발걸음이 지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날라온 기분좋은 소식이 이렇게 기분좋고 나른하게 만들었나. 어느새 회사에 몸담은지 1년이 지났고, 연봉협상안에 관한 문서를 메일로 확인했을땐 예상보다 큰폭의 인상률에 깜짝 놀랐다. 검은 숫자들은 묘한 고양감에 휩싸이게 했고 머릿속으로 고정금액과 지출에 대한 계산기를 두드렸을땐 이정도면 앞으로 생활에 큰 문제나 어려움은 없겠는데? 라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끼고 배부른 고양이마냥 흐뭇한 표정을 짓다 번뜩 몇달전 결혼을 꿈꾸고 장기적인 인생의 계획을 구성하던게 기억났다. 직장인 정년의 나이를 생각하면 안정적인 직장생활은 지금부터 고작 20년. 이 시간이 앞으로의 경제적 생활을 좌지우지할거라 생각하니 가진것과 지금 위치에 만족을 해서는 안돼, 라는 마음에 안주를 경계하고 풀어지는 마음을 어르고 달래 다시 숨이 막히기 직전까지 꽉 조여버린다.
작은 발걸음이 하나 하나 모이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목적지는 아직 너무나도 멀지만 올라온 거리도 결코 짧진않다. 더 더 더 움직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