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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밭 구덩이 찾기🐕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산업용 고무처럼 가해진 힘 만큼만 모양이 변했다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가는 존재일지도 몰라. 모양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여유가 있다면 신경 쓸 수 있다. 하지만 여유가 없어지면 금방 내가 편한 형태로 왈칵, 고집을 부려버린다. 그럴 때, 일정한 거리감은 쉽게 흐려지고 상대를 휘두르고 싶어하는 마음은 불쑥 행동으로 실현된다. 이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가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주말에는 홀로 푹 쉰다. 하지만 결국 마음은 늘 내게 고여 있어서 어떠한 행동과 대체재로는 정리되지 않는다. 지워지지도, 덮이지도, 심지어 흘러가지도 못한다. 나는 늘 고여있는 느낌이고 매번 같은 행동을 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이다.
공포와 추리 장르를 좋아한다. 한 번 보고 마음에 든 작품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본다. 집중해서 볼 때도 있고 틀어놓고 다른 작업을 할 때도 있다. 최근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를 다시 보고 있다. 살인사건 안에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있고 사건과 관계가 있는 일, 없는 일이 잘못 꼬여 있어 진실은 계속 지워진다. 이야기 안 모든 캐릭터는 여유가 없고 눈빛 하나에도 궁지에 몰린다. 그래서 모든 사건이 해결됐을 때, 정확히는 탐정이 모두 해결했을 때, 모든 캐릭터는 사건이 해결되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내 안의 너무 많은 나 중 내가 바라는 내가 나오는 엔딩 씬. 핵심 이슈는 해결되고 해결사 덕에 나는 다시 여유를 찾으며 만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되찾는다.
감사하는 마음과 거리두기야말로 스스로 반복해서 주지시키고 있는 두 가지 키워드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늘 마음 속에 있는 ‘만사에 감사하라’는 말의 근원은 개신교에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읽었던 시, ‘만파식적’에 나오는 부부 사이에 조차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그 말. 집에 같이 사는 동물 조차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늘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레퍼런스를 차곡차곡 쌓고, 만사에서 배우며, 실제로 여러 관계 속에서 시행착오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서 경험해도 난 참 변하질 못한다. 산업용 고무처럼 결국에는 형태가 고정된 채 늙어버리는 거 아닐지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게 될까?
그래서 결국 나는 계속 경문왕의 신하처럼 대나무 밭 구덩이를 찾아다닌다. 내 안에 계속 고이는 감정, 생각, 기분, 상상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내가 현실에서도, 내 안에도 나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안다. 내 안에 매일 새롭게 고이고 엉기는 이야기들, 하지만 타인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와 그에 대한 내 판단과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구덩이를 찾아다닌다. 나의 에르큘 포와로는, 미스 마플은 요가일 수도 상담사일 수도 다른 공부일 수도 있겠지. 계속 찾고 있다.
🐴시작은 모래냄새
이사 온 뒤 내 머리에서는 모래바람 냄새가 났다. 바다가 가까운 도시이기 때문인 걸까. 낭만적으로 생각해볼까도 싶었지만, 실패했다.
새로 이사 온 집의 물은 이미 입주 전부터 녹물이 나오네, 물 색이 노랗네, 비린내가 나네 하며 말들이 많았었다. 철저한 사전계획형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극 J인 나는 들어오기도 전부터 정수 필터들을 검색, 비교한 뒤 입주일에 맞춰 필터를 받아 장착했고, 그 덕인지 갈색의 물을 맞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탁하긴 한 탓에 거울과 세면대 근처에 자주 물자국을 닦어줘야 했다. 이뿐이랴, 왠지 머리를 감아도 머리가 이따금 가려웠고,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건 머리에 하얀 비듬같은 것들이 내 눈에 띄게 된 거다. 원래 머리에 신경을 쓴다면 썼지, 소홀하진 않았는데.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거다. 머리를 짜를까.
신기한 일이었다. 두 달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머리가 다 상했을 때도 더 길러서 다듬으면 다듬었지, 짤라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긴 머리는 내가 고수해야할 원칙이자 내 정체성과도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머릴 짤라야겠다는, 지금이 기회란 생각이 문득 든 거다.
공부를 하다보면 시간에 쫓기게 되는데, 긴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 시간이 언제부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긴 머리가 내게 자신감을 주기 보단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느껴지게 된 거다. 더불어 무엇보다 부담이 덜 했다. 머리를 짜르고 나서 들을 주변의 말에 대한 부담. 남들의 시선, 말들을 접할 기회가 확 줄어든 지금. 지금이 적기다 싶었다. 그래, 지금 나는 내 눈치만 보면 돼. 더 지체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곧장 헤어샵을 예약하고 그 날만을 기다렸다. 머리를 짜르기로 결정한 다음엔 지금 머리가 유독 예뻐보인다지만 이번엔 그 위기 또한 이겨냈다. 그리고 당일, 내가원하는 숏컷의 이미지들을 모아서 헤어샵으로 향했다.
자, 짜를게요. 거울 속에 가위질 한 번으로 단발이 된 내 모습이 어색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느껴진 건 가벼움이었다. 아, 이런 느낌인 건가. 목에 느껴지던 불편감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었다. 내 긴 머리를 펌하던 원장쌤이 섬세하지만 날카로운 가위질로 내 머리들을 쳐냈다. 그때 막 헤어샵으로 들어오는 애인이 보였다. 그가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걸 보며, 성공이다! 싶어 웃음이 났다. 그렇게 나는 짧은 머리가 되었다.
숏컷을 한 뒤로 가장 신기하고 또 행복했던 건 머리를 손질하는데 드는 시간이 엄청 줄어들었다는 거다. 머리 적시는 데 5초, 샴푸 바르는 데 10초, 머리 닦고 말리는 데 5분..! 족히 30분은 걸리던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스타일도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든다. 괜히 목도 더 길어진 것 같고, 얼굴도 작아 보인다. 머리 스타일 하나 바꿨을 뿐인데, 내 기분과 주변이 모두 환기된 것 같다. 진작 할 걸. 진작해 버릴 걸! 새로운 내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든다.
🍷기온이 덩어리져 구르는 계절들
지지난 주는 여름의 끝물이었다. 반소매에 가디건을 입고 얇은 청바지를 입으면 술을 마시거나 열 받는 일이 있을 때는 반소매로, 야외에서는 긴 팔로 지내기 딱 좋았다. 지난주는 여름도 가을도 아닌 갑작스러운 겨울이었다. 니트에 가디건을 입었다간 추위에 혼쭐이 났다. 너무 추워서 가만히 서 있으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목 사이로 칼바람이 다 불고 건물 사이의 도로가 을씨년스러워지는 겨울. 아직 10월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트렌치코트를 봉인하고 한겨울 코트를 꺼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오늘은 또 가을의 한복판이다.
전에는 이 정도까지가 아니었는데 어느새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는 좋았던 날씨가 지금은 못 견디는 날씨가 되기도 하고,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온도의 순간이 지금은 못 견디게 좋은 순간이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아니 정확히는 많은 시간의 경험치가 생긴다는 건 취향이 바뀌기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기억이 책갈피처럼 시간 사이사이에 끼워져 취향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가장 극단적인 변화에는 비가 존재한다. 예전에는 눈 만난 강아지처럼 비 오는 날이면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우산에 닿는 빗방울도 좋고 발치에 촉촉이 젖는 습도도 좋았다. 그러나 다수의 경험–옷이 젖어 불편하거나 습도가 높으면 벌어지는 각종 불편한 컨디션들-을 통해 더는 바깥을 헤집고 다니는 게 불편해지고, 남은 건 비 오는 바깥을 보는 걸 좋아하는 마음뿐이다. 눅눅한 공기와 쌀쌀한 온도에 따끈한 커피 한잔이면 –또는 따듯한 주류- 그렇게 몸이 노곤할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에 비 냄새라고 부르는 냄새는 수분을 머금은 먼지가 가라앉은 냄새라고들 한다. 그게 먼지 냄새라는 얘기를 들어도 여전히 그 냄새가 너무 좋다. 나긋한 음악을 틀어놓고 날씨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그 이상의 날씨가 없는 것이다.
온도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디까지일까. 날씨가 변하면 가을을 타거나 봄을 타는 사람들도 있다. 날씨가 변했다고 사람의 감정까지 흔들리다니. 신기하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 환경 한 가운데에 사는 인간인데, 그 환경에 그만큼 영향을 받는 게 새삼스러울 건 아니니까. 가을과 봄에 감정 영향을 받는 건 아니지만, 겨울의 찬 온도에는 속절없이 우울해진다. 추위는 사람을 서럽게 만든다. 작은 일도 슬프고 서러워, 연인이 없으면 없는 처지가 슬프게 느껴지는 정도다. 주머니에 꼬박꼬박 핫팩을 넣고 다녀도 팔뚝이 조금이라도 썰렁하면 또 속없이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추위에 내가 너무 서럽다고. 추워서 너무 외롭다고. 그런 식으로.
그렇다고 내가 추위를 마냥 싫어하는 건 아니다. 추위는 온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한다. 갑자기 들른 가게의 온풍기 온도나, 하다못해 붕어빵을 감싼 종이 온도까지. 추운 겨울 이불을 덮고 전기장판을 틀어놓으면 그 이상의 안온함이 없다. 거기에 차가운 물에 뽀득뽀득 씻은 귤까지 함께라면.
날씨와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짝꿍이다. 찬 바람이 불면 붕어빵. 더워지는 여름엔 초계 국수. 찌는 더위엔 오미자차. 습하고 쨍쨍한 장마철에는 설탕 듬뿍 넣은 되직한 미숫가루. 눈이 푹푹 나리는 겨울에는 따끈한 오뎅탕. –그리고 정종- 다른 기온에서 먹으면 느낄 수 없는 만족스러움이 그 순간, 그 기온과 습도 –그리고 조명- 사이에서 딱 맞아 떨어져 느껴지는 것이다.
해가 넘겨 봄이 되면 몸은 또 까무룩 하게 잠들겠지. 나는 또 분명 제철 음식을 먹어 깨우거나 산과 들로 나다니며 바깥 공기를 마실 것이다. 배알도 없는 몸은 그런 간단한 조치에도 곧 활기를 찾을 것이고 나는 또 이번 봄도 무사히 지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간이 지나 나의 날씨 취향은 만들어졌다.
지금은 청명한 하늘을 보며 쌀쌀해진 기온이 덩어리져 굴러다니며 갑자기 추워지고 갑자기 따스해지는 계절을 따듯하거나 시원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음식은 뭐가 좋을까. 역시 밤에는 칼칼한 알탕, 낮에는 싱그러운 채소로 가득 채워진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려나.
✒ 이달의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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