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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전연령가 소설을 쓰는 자의 고민
전연령가 소설은 당연히 나오면 안 되는 장면이 천지삐까리다.
19금 씬에 대한 묘사? 어딜 묘사해.
마약이나 강도 높은 폭력성에 대한 묘사? 당연히.
지나친 욕설? 안 된다.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주제 의식들.
역시 안 된다.
뭐 안 쓰면 된다. 그래서 전체 이용가를 선택하기도 했고.
지금 쓰는 글엔 19금 씬도 안 나오고, 불법 약물 빨고 환락파티 하는 인물 따위도 안 나온다.
주인공이 가끔 욕설을 내뱉긴 하는데, 나에겐 X가 있지 않나. XX로 표기해주면 되니 오케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XX로 써봤자, 자유로운 초등학생들이 그것을 씨X, 지X 이렇게 알아서 필터링해 읽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사실 난 그건 크게 걱정 안 한다.
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생 때란 내 생에 가장 입이 더러웠던 시기다.
왜 그렇게 마디 마디에 욕을 끼워넣지 않으면 말을 못 했을까 그땐.
어쨌거나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초등학생은 머리가 크면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인지한다.
알아서 자정작용을 거친다.
내가 그랬듯, 많은 초등학생들도 크면서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하는 쪽으로 자연스레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글에 욕을 섞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크게 없는 편인데.
문제는 주인공이 나쁜 놈을 응징할 때다. 이때 고민하게 된다.
어느 수준으로 응징해야 어린이들이 놀라지 않을까.
또 주인공이 하는 행동에 저도 모르게 정당성을 부여해버린 어린이들이.
‘아 나쁜 사람에겐 팔 하나, 다리 하나 망가트리는 것 쯤은 정당한 거구나.’
이렇게 오해할까봐.
나를 생각하면 음, 사실 난 초등학생 때 더 어마어마한 것들을 접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났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내 경우가 만국 공통은 아니요, 모든 어린이 해당은 아니니까.
으이씨 이렇게 고민할 거면 15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봐.
🌎_산책
우리 집 근처에 개천을 따라 벚나무 가로수가 몇백미터 이어진 길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딱 꽃이 만개한 상태다. 작년은 올해보다 개화가 일렀는데 그 때는 귀가길에 꽃을 좀 보려고 개천길로 천천히 돌아서 오다가 인파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예전에도 사람 많은 곳을 즐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판데믹의 시대니까…. (이거 아세요? 제가 노리밋 필진 중 최후로 남은 코로나19 안걸려본 사람이라는 걸.) 평소 사람 없는 맛에 다니던 한갓진 도로변에조차 사람이 많은 것에 질렸던 기억에 올해는 미리부터 조금 관찰을 해보았다. 일부러 시간대별로 외출할 일을 만들어 근처를 둘러봤는데, 저녁식사 이후 시간부터 밤이 가장 인파가 많았고 해 뜬 직후가 가장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개화가 시작된 지금, 며칠째 늦어도 아침 7시 반에는 산책을 나가고 있다…. 그다지 건강한 생활은 아닌 게 일찍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들지 않고 이 꽃구경 산책을 위해 수면시간을 깎아먹고 있다. 약간 덕질하듯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시간, 혹은 경험이 고팠던 것 같다. 지난 밤의 꽃놀이 인파가 버리고 간 대량의 일회용 커피컵 산을 목격하거나 개화시기를 분석하며 기후위기를 걱정하던 소식들을 떠올리면 산책길에도 이런 저런 걱정이 안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겨우내 방 안에서 느끼지 못한 종류의 자극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자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고 하면 너무 포장일까. 지금은 이런 사소한 일에서 너무 의미를 찾고 싶지 않다. 우연찮게 계속 날씨가 좋았다. 집 앞에 꽃이 가득 피었다. 즐기고 있다.
💃🏻🐆_충전중
개도 그렇다. 고양이처럼 자신을 자유롭게 두는 사람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리고 내게 편안한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면 관계가 쌓인다. 누군가의 옆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건 어떤 걸까. 상대가 나를 존중한다는 감각과 함께 안정적인 상태가 체감되는 거라고 추측한다. 왜 추측만 하고 있냐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적당한 상태에서 아름다움과 완성을 찾았다는데 수만 수천의 상사가 주문하는 적당함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늘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침묵, 적당한 관계를 갈망하고 있다. 내가 사람과의 관계에 여전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탐욕스럽다.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늘 그렇듯 무언가를 시작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단순히 열심히 하는 걸로는 한계가 찾아온다. 능력에서도, 결과에서도, 나 자신의 안에서도.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과 인정받고 싶은 갈망은 연결되어 있고 또 충돌한다. 인정을 받고 싶다는데 집착하고 거기에만 매몰되면서 직장에서 퇴근을 못 하는 거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일부 동의한다. 정말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의 우선순위와 투입시간, 밸런스를 적당히 조절하며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므로. 삼십대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명확하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다. 삼십대가 허접살이라더니!
✒ 이달의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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