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버의 수명은 짧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튜버도 몇 해만 지나면 퇴물이라는 소리를 듣죠.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겨우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경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작년 한 해에만 수익창출 가능한 채널이 4만 개나 증가하여, 현재 대한민국 인구 529명당 1명이 유튜버로 활동 중입니다. 일부 섬나라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인구수 대비 가장 많은 유튜버를 보유한 셈이죠.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참여자의 질도 달라졌습니다. 가수, 배우, 코미디언 같은 연예인뿐만 아니라 의사, 변호사, 정치인 같은 전문직들도 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 문법을 숙달한 방송국들은 수십 년간 쌓아온 콘텐츠들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시장의 파이는 고만고만한데 채널만 '왕창' 늘었습니다. 탑 유튜버들의 고민은 점점 깊어집니다. 노력을 덜 쏟는 것도 아니고 콘텐츠가 달라진 것도 아닌데, 트래픽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죠. 유입량을 좌지우지하는 추천 알고리즘은 근속연수 따위는 고려해주지 않으니까요. 위기를 느낀 누군가는 얼마 남지 않은 트래픽을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화장품 사업으로, 슬라임 생산업자로, 식당 주인으로 업종 전환하여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출구를 찾아낸 사람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그렇지 못한 유튜버들은 죽어가는 채널을 지켜보거나, 뒷 광고 논란으로 조기 처형당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잠적을 택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황당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136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대한민국 유튜브계 인싸 중에 인싸, 콜라보 안 해본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다는 그 유튜버가 돌연 은퇴 선언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트래픽이 잘 안 나와서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은퇴 일주일 전에 올린 스윙스, 슈퍼비와의 콜라보 영상은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했으니까요.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의 소식으로 술렁거렸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영상이 이리저리 퍼져나갔습니다. '박수 칠 때 떠난다'.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꽈뚜룹이었습니다.
영상 제작자를 꿈꿨던 탑 유튜버
꽈뚜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미국인'이라는 컨셉으로 2016년부터 활동한 유튜버입니다. 미국에서는 Miranda Sings(구독자 1090만, 춤과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거만한 음치 컨셉의 채널로 본캐인 Colleen Ballinger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가수 겸 코미디언이다.)처럼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채널이 많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개념이었습니다. '부캐'라는 단어가 이제야 유행할 정도니까요.
꽈뚜룹의 본캐는 1999년생 한국인 '장지수'입니다. 고등학생 때 영화제에 참여해 우수상을 탈 정도로 영상제작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꽈뚜룹'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냅니다. 평소 장지수를 지켜보던 티키틱 멤버 김은택이 그에게 딱 맞는 옷을 제안해준 덕분이었죠. 활동 초기에는 영상 속에 '가상의 인물입니다'라는 설명을 넣는 등 페이크 브이로그임을 명시하였으나, 시청자들은 팩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유튜브에 만연한 K-국뽕 감성을 희극적으로 비튼 그의 영상은 초반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그렇게 현실의 장지수는 꽈뚜룹과 동기화되었습니다.
꽈뚜룹은 작년 화제작 <가짜사나이>에 출연했을 때조차 그 특유의 말투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공황장애를 겪고 있음을 밝히며 눈물을 흘렸죠. 아마 그때부터 꽈뚜룹이라는 가면을 벗을 준비를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꽈뚜룹은 은퇴를 했고, 인간 장지수는 꿈이 었던 제작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또 모릅니다. 이건 단순 해프닝이었다며, '짠!'하고 꽈뚜룹 시즌2로 돌아올 수도 있죠.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입니다. 꽈뚜룹으로 활동했던 5년 동안 콘텐츠 제작업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고, 변화의 한 복판에 서있던 그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을 거란 사실 말이죠.
유재석보다 김계란
지난 8월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가짜사나이> 제작사 쓰리와이코프레이션을 180억 원에 인수했습니다. 인수액 중 영업권이 171억을 차지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인수한 안테나의 총 인수액이 139억 원(영업권 125억)인 것에 비하면 꽤 큰 금액입니다. 영업권이란 회사의 경영능력, 브랜드 가치, 영업상의 비법과 같은 무형적 재산가치를 평가하는 말인데요. 이에 따르면 유명 연예인과 아티스트가 소속된 안테나보다 설립 1년 차 신생기업의 미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쓰리와이코프레이션은 채용 공고에서 자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3Y코퍼레이션은 김계란님 포함 여러 인플루언서가 소속된 MCN이자 가짜사나이/머니게임 등을 제작한 디지털 콘텐츠 제작사입니다."
유재석보다 김계란인 걸까요.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Z세대에게 TV란 '부모님, '추억', '어린 시절', '200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과거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수행한 <2020년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서도 나타나는데요. 1020세대와 기성세대 간 매체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콘텐츠 전쟁은 손바닥 안에서 이뤄집니다. 대규모 인력과 자본이 투입된 레거시 미디어의 콘텐츠와 1인 미디어 콘텐츠가 같은 판에서 경쟁하는 셈이죠.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조회수, 좋아요, 댓글 덕분에 콘텐츠의 가치를 평가하기도 쉬워졌습니다. 이 전쟁터에서 유튜버들은 어떨 땐 경쟁자였다가, 용병이었다가, 동업자가 되기도 합니다. 짧은 수명을 극복하고 꾸준히 성과를 내는 채널에 희소가치가 더해지는 이유입니다.
유튜버 전관예우의 시대
2015년 10월, 구글은 유료 구독 서비스 'YouTube Red'(현재 YouTube Premium)를 미국 시장에 출시합니다. 광고 없는 영상 시청, 오프라인 저장, 백그라운드 재생과 같은 기능을 포함하여, 유튜브가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무료로 볼 수 있는 서비스였죠. 여기서 유튜브는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자)했던 유튜버들과 협업하여 오리지널 시리즈를 제작한 것이었죠. 방에서 혼자 게임만 하던 퓨디파이를 밖으로 꺼내 리얼리티쇼 <Scare PewDiePie>를 만들고, 저예산 1인 상황극을 찍던 릴리 싱과 월드투어 다큐멘터리 <A Trip to Unicorn Island>를 만들었습니다. 팬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유튜버의 모습을 고퀄리티로 감상할 수 있었고, 유튜브는 콘텐츠를 수급하면서 서비스도 홍보하고 유료 가입자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유튜버 입장에서도 아쉴 것이 없었습니다. 예산 부담 없이 대규모 신규 콘텐츠도 만들고, 구글이 YouTube Red를 광고하면 할수록 채널 트래픽과 신규 유입은 계속 늘어났으니까요.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시차를 두고 대한민국에서 비슷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유튜브 외에도 다양한 사업자들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제작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죠. 올해만 하더라도 왓챠는 이과장 채널과 <좋좋소>를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둔 뒤 후속 시즌을 준비 중이고, 카카오TV는 코리안좀비 황찬성 채널과 <파이트 클럽>을, CJ DIA TV는 앞서 소개드린 꽈뚜룹 채널과 <공범>을 제작하여 현재 방영 중입니다. 이외에도 중견/중소기업들의 제작 후원으로 여러 유튜버의 채널에서 오리지널 콘텐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웹콘텐츠 제작에 있어 유튜버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입니다. 기본적인 기획, 촬영, 편집 능력은 물론 콘텐츠를 확산시킬 수 있는 매체력도 가지고 있죠. 유튜버로 활동하며 쌓은 인적 네트워크도 풍부합니다. 카톡 메시지 하나로 탑 유튜버를 섭외하고, 필요하다면 서로 간 2차, 3차 콘텐츠 재가공을 통해 바이럴을 일으킬 수도 있죠. 실제 <좋좋소>의 경우, '빠니보틀'이라는 여행 유튜버가 '곽튜브'의 중소기업 경험을 기반으로 각본을 짠 뒤, 중소기업 유튜브계 1인자인 '이과장'에게 제안하여 만들어진 콘텐츠입니다. 타깃 시청자를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영상은 공개 2주 만에 1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트렸고, 이후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왓챠를 '선택'해주었습니다.
꽈뚜룹의 은퇴작이자, 장지수의 입봉작인 <공범>이 순항 중입니다. 3화까지 공개된 현재 시리즈 전체 조회수는 700만 회를 넘었고, 매 에피소드마다 공범을 추적하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비슷한 장르였던 <머니게임>보다 덜 매운맛이지만 그래서 좋다는 의견도 보이고요. 20년 경력의 강력계 형사와 래퍼 오메가 사피엔의 출연도 신선합니다. 최종화까지 업로드돼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일단 그의 퇴직 후 개업은 꽤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도 당분간 유튜버를 향한 수임 의뢰는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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