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와 1번 손녀

혹시 유튜브 문명특급 보시나요?

이 누추한 뉴스레터까지 구독하는 분이시라면.. 보지는 않더라도 모르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스브스뉴스 채널에 있을 때부터 즐겨봤었는데, 요새는 새 영상이 올라오는 목요일 5시에 대기하고 있다가 보기도 할 만큼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입니다. 어제는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즌2 공개를 앞두고, 주연 배우들 인터뷰가 올라왔더라고요!

저도 <펜트하우스> 시즌2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시청자로서 인터뷰도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영상 말미에 다음 콘텐츠 예고편이 나오는데.. 아니 세상에 윤여정 배우님이! 나오시더라고요! 

작년 이맘 때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수상을 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면, 올해는 영화 <미나리>와 윤여정 배우님의 수상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의 이야기라는데, 그래서 영화 속 한국어 대사 분량이 꽤 되고 그것을 이유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대신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아마 작년의 <기생충> 오스카 레이스를 쭉 따라갔던 분이라면 어렴풋이.. 이 논란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실 거에요. 일찍이(?) 유사한 논란이 있었던 영화가 2020년 골든글로브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기생충>이 수상했던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 중 하나였던 영화 <페어웰> 이에요.

영화 <페어웰>은 이 문구와 함께 시작합니다.
"Based on an actual lie"

뭐.. 저는 이 문장이 그냥 농담 같은 것인줄 알았어요. 이야기라는 것이.. 픽션이라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종의 거짓말이니까 그냥 슬쩍 웃자고 쓴 말인줄 알고 넘겼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뉴욕에서 중국의 할머니와 전화를 하고 있는 빌리(Awkwafina 분). 대화를 듣자 하니 빌리와 할머니는 별일이 없어도 안부 확인 차, 자주 통화를 하는 듯합니다. 할머니는 큰 병원에, 빌리는 길 위에 있습니다. 빌리는 병원에서 방송하는 소리에, 할머니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들리는 소음에 자꾸만 되묻죠.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어? 그리고 둘은 둘러댑니다. 아 할머니, 내 친구야. 응 별일 아니야, 이모 할머니 때문에 병원에 왔단다. 날이 추운데 모자는 썼니? 당연하죠 할머니.

영화 <페어웰>은 할머니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가족들이 고향인 중국으로 모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중국에서는 가족의 어른이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일종의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이를 본인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해요. 물론 끝까지 그런 것은 아니고, 진단을 받은 직후에는 비밀로 하다가 정말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알려 드린다고 하는데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암이 아니라 공포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택한다고 합니다.

빌리의 부모님은 빌리가 할머니와 각별하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아예 빌리는 뉴욕에 두고 중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빌리는 슬픔과 분노, 혼란이 뒤섞인 얼굴로 결국 할머니가 계신 중국으로 향하죠. 그리고 할머니, 다른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할머니에게 정말로 계속 숨겨야 할까? 할머니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면 어떡하지?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 미국에선 불법인데? 같은 질문을 꾹 눌러 담은 채로요.

빌리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에요. 첫째 아들 그러니까 빌리의 큰아버지는 일본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빌리의 할머니는 자식들은 다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거죠. 할머니와 실제로 함께 지내고 있는 건 할머니의 동생과 그 동생의 딸 가족입니다.

이렇게 가족만 다 모여도 10명이 넘어가는 대가족인데, 거기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있고요. 미국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빌리의 아빠와 미국적인 사고방식 뿐인 빌리, 중국계 이민자로 가정을 꾸려오면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굳혀 온 빌리의 엄마, 한편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중국인으로서 사고가 크게 바뀌지 않은 빌리의 큰아버지와, 중국어에 서툰 빌리의 사촌.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데 가족과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있는 사촌의 약혼녀까지.

뭐 사람이 다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있다지만 이 가족들은 정말로 한 명 한 명 모두 다른 입장과 상처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하나의 거짓말을 위해 연대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죠. 느낌이 오시겠지만, 이것만으로도 <페어웰>은 할 이야기가 차고 넘치는 영화입니다.

근데 그런 이야기 말고요, 저는 사실 그냥 할머니와 빌리의 대화로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 버렸어요. 할머니가 손자(빌리의 사촌이쥬)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빌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이 많은데 그 장면마다 오퍼시티 80 정도로 자꾸 저의 외할머니가 비쳤거든요.

친구는 있니? 그냥 친구 말고 '특별한' 친구 말이야.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엔 얼마나 외롭겠어. 널 보살펴 줄 좋은 사람이 필요해. 그래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다. 넌 잘 살거야!

정말 정확히 저의 외할머니가 지난 연말에 저한테 하신 얘기거든요? 괜찮은 아 없나. 와 없나. 다 눈이 삐었나. 삔 것들 데리고 살 필요 없다. 표현이 재금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맥락이잖아요. 할머니와 할머니가 제일 예뻐하는 손녀의 특별한 우정. (여담인데 열두 살 어린 저의 사촌동생은 저보다 훨씬 자주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드린대요. 그런데 저랑 목소리가 비슷해서, 할머니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저냐고 물어보고, 사촌동생은 맨날 언니만 찾는다고 시무룩해 한다고 합니다. 홀홀홀.. 이래서 항상 선점이 중요하단다(?) 호호호..)

중국인 가족이 공유하는 특유의 문화와 경계인으로서 느끼는 소외 같은 것이 이 이야기의 특수성을 담당한다면, 할머니와 1번 손녀 사이의 우정과 '선의의 거짓말'은 보편성을 담당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밸런스가 저는 아주 흡족했어요. 가족 사이의 선의의 거짓말과, 선의와, 거짓말에 대한 영화, <페어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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