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너무 많이 봐 범죄 다큐

전에 살던 도시에서 종종 만나 놀았던 E는 아마도 나를 범죄 다큐멘터리 매니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오늘 뭐 했어? 하는 물으면 열에 아홉 정도 또 범죄 다큐멘터리 보는 중..이라고 대답했기 때문. 혼자 외지에 사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이 다큐멘터리를, 특히 범죄를 다루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알 유튜브 채널에 오늘 기준으로 올라와 있는 영상이 1,020개인데 이 중에 1,000개는 본 것이라고 자부한다. JTBC 악인취재기, 웨이브 오리지널 국가수사본부는 말할 것도 없다. 넷플릭스에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만 개는 있을 것 같다. 스웨덴에 있을 때는 한국 넷플릭스에 없어서 한국어 자막이 없는 것도 꾸역꾸역 영어 자막을 켜고 봤다.

그러다 보니 간혹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추천해달라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좀 생각을 더 하게 된다. 무엇이 좋은 범죄 다큐멘터리인가? 몰랐던 잔악무도한 사건을 알게 되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명한 범죄자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아는 게 좋은지? 이걸 보고 어떤 식의 '예방'이 이루어지면 좋은지? 이걸 '재미있게' 봐도 되는지? 피해 사실을 길고 자세하게 보는 것은 어떤 도움이 되는지?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지 않기 위한 목표를 이루려다가 단순한 악마화로 끝내고 있지는 않은지? 실존하는 사람의 비극 혹은 악의를 '흥미롭게' 연출하는 것은 윤리적인지? 혹은 다큐멘터리는 꼭 윤리적이어야 되는지? 그런 질문들이다. 그래도 이왕 생각한 김에 나름대로 나에게 '좋은 다큐'를 가리는 척도를 마련해봤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픽션인 영화를 볼 때 처럼, 다 보고 나면 무작정 '아 좋았다' 하는 작품들도 있다. 연출은 그냥 그랬는데 어떤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너무 강렬할 때도 있다. 어떤 다큐는 인터뷰이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다른 단점이 다 가려진다. 그럼 또 그런대로 그냥 보면 되는 거겠지.

아무튼 그래서 새로 나왔다고 하니 그냥 본 <제니퍼는 무슨 짓을 했는가>는 애초에 메인 시청자를 이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으로 상정한 것인지 그 반대인지가 궁금해지는 다큐였다. 왜나하면 나는 제목을 보고 전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사실은.. 이랬습니다!' 식의 서스펜스를 주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고, 그런데 또 후자라고 생각하기엔 그 노력이 하다만 것이어서 '도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가 나의 감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혹시 그것이 언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아시안이?' '그런 거짓말을?' 같은 것들이 덧발라져서 대충격!이 된 사건이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제니퍼는 그런 짓을 했다고 한다.

...더 좋았던 다큐를 몇 개 덧붙여 보겠다.

이 다큐멘터리의 화자는 뉴욕 경찰과 사법 당국이다. 증거를 찾아 가해자에게 적법한 처벌을 내리기 위한 어마어마한 노력과, 그 과정에서의 팀워크, 인간적인 고뇌 같은 것들이 가해자의 서사보다 훨씬 들을 가치가 있다.

이 사건에는 자기가 피해자인데도 피해 사실을 직접 진술할 수 없었던 피해자가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의 연출 상의 선택을 통해 마침내 피해자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 사이다를 찾는다면 이런 것이 사이다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에는 90분으로 끝냈어야 하는데 6부작으로 늘려 놓은 다큐도 꽤 많은데(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 봄), 이 다큐는 다 보고 나면 이 사건은 이 정도의 시간이 할애되어야 하는 일이다, 하는 부분에서 납득이 된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미치도록 흥미롭고 이해관계자가 너무나 다양하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놀라셨나용? 그 동안 무고하셨는지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한 침묵 끝에 새 단장을 하고, 2년 만에 편지를 드려봅니다. 앞으로 좀 더 솔직하고 간결한 아무 말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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