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아직 4월 1일 만우절입니다! 

여러분은 어제 어떤 거짓말을 하셨어요? 혹은 재미있었던 거짓말 들으신 것 있나요? 👀 전 올해는 캐릿 Careet 인스타그램의 산 좋아하는 부장님 포스팅을 보고 제일 크게 웃었어요! 이 포스팅 덕에 무려 172명의 팔로워를 잃었다는 후기가,, 같은 업자(?) 입장에서 너무 짠하면서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에 만우절을 가장 즐겁게 보낸 것 같아요. 3학년 선배들이 너한테 화가 아주 많이 났어.. 같은 고전적인 레파토리로 건장한 남자 후배 애를 눈물 짓게도 했고..(그 후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사과 + 잘 합의했습니다..) 특히 첫사랑과 짝사랑이 들불처럼 번지는 고등학교에서 만우절은 용기 없는 청소년들에게 정당한(?) 간 볼(??) 기회가 되어 주었죠. 저도 007 마냥 첩보에 가깝게 숨겼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던 것 같고, 또 내가 좋아하는 그 애가 누군가와 간을 보고 있지는 않은지.. 신경이 곤두서기도 하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에 재미거리가 많기도 했고, 그의 전성기에 저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2003년 4월 1일에 대해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아요. 뉴스 화면으로 전해지는 홍콩의 스카이라인과 호텔에서 투신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정말 '영화 같은' 설명, Depression! 으로 시작하는 그가 남긴 메모 같은 조각난 기억들만 떠오릅니다.

어쩌면 그 때 장국영을 잘 알았더라도, 저는 저 말에 담긴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 당시의 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피곤해지기에, 세상에는 너무나 궁금하고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애였거든요.

고등학생 시절의 저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임청하와 금성무가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보다 양조위와 왕페이가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를 더 좋아했는데요. 지금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삽입곡들과 감각적인 화면을 생각하면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을 때 꼭 봐야 할 것 같은데, 좋아했던 장면들이 낡은 것으로 느껴질까봐 다시 보는 게 좀 저어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633이 걸어오면서 경찰모 벗고 주문하는 그 쇼트의 아름다움이야... 가시지 않았을텐데 이 생각을 하니 지금 당장 예매를 해야겠네요)

대학생이 되어 보고 싶은 영화는 다 볼 수 있게 된 이후에, 한창 홍콩 영화들을 많이 보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중경삼림>으로 시작해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아비정전> 같은 영화를 봤고 장국영이 눈에 익을 무렵 옛날 인사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웅본색>을 봤어요.

아.. 다들 좋다니까, 홍콩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니까, 꼭 봐야 한다니까 본 것이었는데.. 주윤발 선생님이 모터보트 돌려서 돌아올 때부터 영화 끝날 때 까지 저는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영웅본색의 영어 제목이 A Better Tomorrow 잖아요. 이 그냥 A Better Tomorrow를 바란 것 뿐인데.. 하면서 제가 다 속상하고 억울해서 과몰입해버렸죠..

그 이후 <영웅본색 2>에서 자걸이 송..호연 할 때 또 한 번 오열하면서 장국영이 출연한 <해피 투게더>, <천녀유혼> 같은 영화를 보고 왕가위, 오우삼 감독의 신작도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 홍콩을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요. 좀 색다르다고 느낀 건 홍콩에서는 어떤 영화의 촬영지, 어떤 장면을 촬영한 곳을 찾아가지 않아도 왠지 그 영화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반갑고 벅찬 마음이 들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여행을 가기 전에 그 여행지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보고, 실제로 그 곳에 갔을 때 드는 느낌을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홍콩에 처음 갔을 때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랑 완차이, 리펄스 베이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갔거든요. 그런데 그 가는 길에 탄 2층 버스에서도,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는 홍콩 섬 도심에서도 이미 신기하고, 반갑고, 친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 다양한 장르, 소재, 감독, 배우들의 이야기들을 '홍콩 영화'라는 한 단어로 한데 묶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다른 나라의 콘텐츠 보다도 유독 홍콩 영화들이 공유하는 감정, 정서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달까요. 그리고 그것은 한꺼번에 대단한 자유가 주어져서 무엇을 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끝에 맞닿아 있는지를 몰라서 그냥 울타리 없는 공터에 서 있는 것 같았던 대학생 시절, 홍콩 영화를 많이 봤던 그 시절의 마음과 엇비슷한 것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2018년 겨울의 짧은 여행이 저의 가장 최근의 홍콩 여행이었어요. 홍콩에서 23시간 대기하는 티켓을 끊어서, 떠나는 길에는 여행에 필요한 자잘한 물건들과 아이폰(!)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는 먹고 싶었던 완탕면, 딤섬 같은 것들을 왕창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이런 글로벌한 역병이 돌 것도, 홍콩이 다시 민주화 운동이 필요한 나라가 될 줄도 몰랐어요. 위의 사진을 찍은 해피밸리의 레스토랑 '예만방'을 찾아가는 길을 진짜 좋아했는데, 예만방은 2020년 여름 폐업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장국영이 생전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해서 처음 갔었는데, 허망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홍콩에서 좋은 기억과 마음을 남긴 공간들이 얼마나 더 사라질까 생각하니 더욱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올해도 4월 1일 그의 기일을 맞아, 홍콩 사람들은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서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꾸렸다고 합니다. 온라인 추모 콘서트도 열렸고, 아직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좋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이상 눈으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게 되고 흐릿해지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서로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힘껏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벌어지길 바라는 좋은 일만 남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저는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제 조금 가늠이 되나봐요. 🌱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