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지난 토요일 얘기를 잠깐 해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일 몇 가지를 해 놓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다시 집으로 오는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미 영화관에 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눈이 떠졌어요. 몇 주 째 주말마다 비가 왔잖아요. 비 오는 아침 = 무조건 늦잠 인 거 아시죠. 뭐 저는 그렇습니다 저는 헤헤..

아무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준비를 해서 나왔는데 그래도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탔습니다. 토요일 오전인데도 왕복 10차선 송파대로에 차가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광고 시간까지 다 잡아 먹어도 겨우 건물 앞에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석촌호수 즈음까지 왔는데, 이제는 차가 완전히 서더라고요. 아, 진짜 요만큼만 더 가면 되는데. 내려서 걸을까, 그건 진짜 완전 늦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 허경영이네. 

그제서야 밖을 보니 차선 중간에 허경영의 유세 차량이 서 있더라고요. 웅웅 울리는 소리만 들려서 뭐라고 얘기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인도 쪽에는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쓴 사람들이 유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 다 허경영 지지자들일까요?

아마 작년에 왓챠에서 <이어즈&이어즈 Years & Years>를 보셨던 분이라면.. 지금 제가 한 이야기를 보고 소름이 돋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작년 3-4월에 이 드라마를 볼 때도 충분히, 이 드라마가 그리는 근미래가 지금의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부분이 많아서 소름이 돋았었거든요.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허경영이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세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후보가 된 지금은 이어즈&이어즈의 미래가 몇 년 앞으로 당겨져서 다가오는 느낌이네요.

아무튼.. 아직 이어즈&이어즈를 보지 않은 분이시라면, 꼭 시간을 내서 보시길 추천합니다. 나중에 저도 한 번 더 보고.. 오브레어에서도 다루고 싶어요. (작년에 볼 때 너무 두려움에 떨면서 봐서.. 언제 다시 볼 용기가 생길지 기약..은 없습니다만.. 네..)

그래서 허경영을 뚫고(?) 보러 간 그 영화는 무엇인고 하면, 바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입니다. 

이 영화는 2011년에 한국에서 개봉했었고, 굉장히 짧은 기간만 영화관에 걸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거의 개봉 하자마자 본 친구가 이 영화 너무 좋다고 해서 그 말을 들은 날 보러 갔는데, 며칠 뒤에 다시 보니 상영중인 영화관이 없었던 기억이 있어요.

운좋게 보게 된 저도 이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잊지 못하고 계속 질척(?)거리게 되었는데요, 그 후 영화관에 같이 걸렸던 자막의 품질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급기야 집단지성으로 새로운 자막을 만든 열성적인 팬들이 생겨났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 다양한 루트로 이 영화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 2021년에는 드디어 재개봉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상영에는 황석희 번역가가 자막 번역을 맡으셨어요.

그간 넷플릭스나 왓챠 등 OTT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테솔스로 줄여 부르겠습니다)가 올라왔을 때, 이 영화를 굳이 다시 보지는 않았어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 '분위기'라고 부를 수 있는 화면, 로케이션, 색감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작은 화면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또 주요한 플롯이 '누가 두더지인지를 찾는다', 배신자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보니 배신자를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본다면 몰입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팅테솔스를 다시 본다면, 저런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큰 스크린으로 관람할 수 있다거나, 그야말로 '연기 구멍이 없는', 열연을 펼친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결국 새로 보고 나니까, 이번에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스파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의 거의 첫 번째 대사가 영화 시작 후 18분 쯤에 나오는데요, "난 은퇴했소, 올리버. 당신이 날 해고했지. I'm retired, Oliver. You fired me." 입니다.

영국 정보부 '서커스'의 수뇌부였던 조지 스마일리는 얼마 전 부다페스트에서 서커스 소속 현장 요원 짐 프리도가 정체를 들켜 사살당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책임으로 국장인 '컨트롤'과 함께 서커스를 나오게 되었거든요. 저 대사에 의하면, 조지 스마일리의 자의로만 결정한 것은 아니었죠.

그런데 퇴직한 요원인 스마일리에게, 차관인 올리버가 찾아와 과거 컨트롤이 서커스 내부, 특히 수뇌부에 이중간첩이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면서 이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황이에요. 안이.. 세상에 퇴직한 직원한테 찾아오는 법이 어딨어... 물론 서커스가 그냥 회사는 아니니까.. 조지 스마일리는 곧 이 일을 받아들이고 두더지를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아주 찰나의 작은 짜증이지만, 왠지 저는 여기서 대단한 일을 하는 국가 공무원으로서의 스파이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조지 스마일리를 살짝 본 것 같아요.

조지 스마일리도 그렇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피터 귈럼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는 조지 스마일리의 지시를 받아 이런 저런 조사나 정보, 서류를 빼 오는 일을 도맡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지시에 순응하지만, 실제로 일을 할 때는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만큼 떨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는 모습,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는 캐비넷 앞에서 손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 서커스로부터 도청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당황하는 모습, 신변을 정리하라는 말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연인과 헤어지는 모습.. 같은 것이 그랬는데요. 마치 해 본 적 없고, 어려워 보이지만, 동시에 멋져 보이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할 쑤 있씁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뒤 울며 불며 새벽까지 잘하려고 노력했던 저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스트레스에 휩싸인 피터 귈럼을 앉혀두고 주적 카를라를 만나 나눴던 대화를 이야기해주는 조지 스마일리의 모습은.. 정말로 눈물 콧물 다 뺀 대리 앞의 부장님으로 보였습니다. 이거 혹시 영국 정보부 판 미생 아닌가요..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같은 영화를 10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렇게까지 다른 점들이 보이더라고요. 그것도 이 영화가 다양한 레이어와 훌륭한 플롯, 배우들의 호연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보통의 스파이 영화가 굉장한 능력과 무기로 무장한 스파이가 악을 척결해나가는 통쾌한 과정을 그린다면, 팅테솔스는 스파이 안에서 스파이의 방식으로 스파이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냉전 시대 스파이들의 직업인으로서의 윤리, 체제에 대한 피로감, 같은 것들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마지막 씬에서 두더지들을 찾아낸 조지 스마일리가 서커스에 돌아와 새로운 '컨트롤'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도 후련함과 통쾌함보다는, 작은 안도감과 새로운 긴장감이 드는 이유겠죠.

팅테솔스를 원래 알고 있던 분이든 아니든, 이번 재상영을 놓치지 말고 이 영화를 꼭 마음에 들이시길 바랍니다. 저는 10년 후에 이 영화를 또 한 번 볼 거에요. 그 때는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저를 사로잡을지, 궁금해집니다. ♟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