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 끝의 지우개는 왜 달려 있는지

오브레어 #12. TV시리즈 <플리백>

2021.04.16 | 조회 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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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본다

시작은 그냥이었지만 끝은 사랑이 된 이야기에 대한 고백

 

할리우드 시상식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2021년 오스카 시상식이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오스카 시상식은 저뿐 아니라, 이 글을 읽는 구독자님도, 그리고 많은 매체의 관심이 잔뜩 쏠려 있는 것 같은데요, 아마도 많은 분이 여우조연상에 후보로 지명된 윤여정 선생님(저를 가르치신 건 아니지만 가르치셨으니까(?) 선생님이라 부르렵니다)이 한국인 배우 최초로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을지 두근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우 얘 이게 무슨 일이니 으응 콧대 높은 영국애들이 상을 줬다 글쎄

 

다들 기억하시는 것처럼, 2020년 오스카도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선사했었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그중 4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non-English 영화 최초로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고,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 영화상을 휩쓸었어요. 지금 그때의 영상을 다시 찾아보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마스크도 안 쓰고) 수상소감을 하는 모습이 (오프라인으로) 정말 생경한 느낌에.. 굉장히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기생충>의 오스카 레이스를 쭉 따라가며 지켜보던 분이라면 계속 같은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영화들도 기억하실 텐데요. 샘 멘데스의 <1917>,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틴 스코시지의 <아이리시맨>, 타이카 와이키키의 <조조 래빗>,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 등이 주로 많이 언급되었던 영화들인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보는 레어 #2.로 다뤘던 룰루 왕 감독의 영화 <페어웰>은 2020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과 함께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영화기도 하고요.

 

2020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역시 <기생충>이 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면서 오스카처럼 주목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골든 글로브는 영화 말고 TV 시리즈도 상을 주잖아요. 이 TV 시리즈 쪽에서도 3개 부문 후보로 올라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2개 부문 수상을 해 버린 드라마가 있거든요? 바로 <플리백> 입니다.

첨부 이미지

 

<플리백>은 2016년 첫 시즌이 나왔고, 2019년 두 번째 시즌이 나온 영국 드라마예요. 두 시즌 모두 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길이의 6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연을 맡은 피비 월러-브리지가 직접 각본을 썼고요,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1인극에서 시작해서 런던 웨스트엔드, 뉴욕을 거쳐 드라마화되었습니다. 사실 무대에 올렸던 버전도 너무 궁금한데, National Theatre LIVE로 제작되었는데 국립극장에서 안 들여오고,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보지 못했어요.. (이 글이 국립극장 관계자분께 가 닿기를.. 그리고 NT LIVE에 대한 저의 사랑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또 한 번.. 써야 쓰겄네요)

아무튼 <플리백>은 지금 한국에서 보려면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어요. 왓챠와 넷플릭스에 항상, 그리고 가끔 티빙, 웨이브에도 돈을 내는 저에게는.. 봐야지 봐야지 근데 언제 의 목록에서 나올 수 없는 콘텐츠였는데요. 지난 겨울에 갑자기 MBC드라마넷에서?? <플리백> 시즌 1, 2 전편을 몰아서 방영해 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 알람 맞춰놓고 전 편을 보고, 다음 방영 때 한 번 더 보고, 아마존 프라임 1주일 무료로 한 번 더 봤답니다.

이 눈빛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찡-긋
이 눈빛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찡-긋

 

<플리백>의 주인공은 피비 월러-브리지가 연기한 런던에 사는 이름 모를 여성이에요. '플리백'은 주인공이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럽고 썩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나 물건. 싸구려 호텔.
더럽고 썩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나 물건. 싸구려 호텔.

 

<플리백>에서 눈에 띄는 연출 상의 특징을 찾는다면 '방백'을 들 수 있는데요. <미란다>의 미란다나, <하우스 오브 카드>의 프랭크 언더우드가 하듯이, 플리백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화면 너머의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눈물이 많은 남자친구는 어떤 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지, 버스에서 눈이 마주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가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그런 건 오직 화면 너머의 사람에게만 알려주죠. 그리고 에피소드가 점점 진행되면서 플리백이 온전하게 정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오직 화면 너머의 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 드라마 안에서 플리백은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상담을 받으러 가서도 농담을 하고,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건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도 별것 아닌 것처럼 대해요. 플리백의 자매인 클레어가 항상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형태로 감정을 숨긴다면, 플리백은 직설적이고, 유쾌하고, 상대를 도발하는 태도와 도움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마음을 숨깁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처음 볼 때, '지금 이 세계관 안에서 플리백은 매력적인 사람인가 아닌가'를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봤거든요. 그게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거예요. 더 자세히 말하면 플리백의 저런 행동은 그녀가 예뻐서, 매력적이어서 용인되는 행동인가? 아니면 플리백은 그냥 평범한 정도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고 그래서 거부당하는 중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는데요.

이야기가 다 끝나고 보니, 플리백도 저도 어떤 '기준'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행동이 있고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니 '나에게 맞는 행동'을 찾아야 하고, 그래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식에 갇혀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플리백의 친구 '부'가 왜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려있는지 아느냐면서, 그건 사람들이 실수하기 때문이야 People make mistakes. It's why they put rubbers on the end of pencils. 라고 말하는 대화 장면이 있는데요. <플리백>을 본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자주 꼽는 부분입니다. 세상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고 세상 심오한 생각을 하게 된 저에게도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요.

구독자님도 봄은 오는데 자꾸만 심오한 생각이 든다면, 이번 주말 <플리백>은 좋은 선택이 될 거예요. 🌷

 


😆 시즌2에서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종종 짤로 돌아다니는, 클레어와 플리백의 우당탕탕 미용실 대소동 입니다. 나른한 오후 웃음이 필요한 분께 권해요!


🎇 글에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즌2는 앤드류 스캇이 연기한 'the hot priest'가 정말 화제였습니다. 인생 뭐 그렇게 급하다구.. 2분 밖에 안 되니까 보고 가세요..!


📚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부모를 실망시키는 기술> 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아직 앞부분만 겨우 읽었지만) 실은 모든 사람을 실망시키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더라고요. 왜 실망을 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다 읽고 나면 내가 플리백처럼 상상의 누군가를 제외한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살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보게 될 것 같은 책이에요. 같이 소개해봅니다!


💃  올해 1월 2일에 공개된 해리 스타일스의 Treat People With Kindness 뮤직비디오에 피비 월러-브리지가 출연했답니다. 사랑스러운 두 사람 구경하고 가세요!


🌷 다른 글에서 플리백의 언니 '클레어'에 대해서 쓴 적이 있어요. 궁금하신 분은 함께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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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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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TT 연구소의 프로필 이미지

    OTT 연구소

    1
    over 3 years 전

    저도 다음주 메일링에 아카데미 작품을 담으려고 준비 중입니다. 확실히 요즘은 시상식 시즌이네요^^

    ㄴ 답글 (1)
  • 조현인의 프로필 이미지

    조현인

    1
    over 3 years 전

    요즘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레어님 안녕하세요.. 첫 독자 댓글을 달아봅니다.. 오늘 추천해주신 드라마에서 향기가 나요.. 내 취향의 향기가...!!! 으악! 당장 아마존 프라임인지 뭔지를 해보려고 해요 멋진 추천 감사해요🤍

    ㄴ 답글 (1)
  • 윤민영의 프로필 이미지

    윤민영

    1
    over 3 year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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