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0.
한국은 벌써 첫눈이 왔다고 한다. 체감상 반년은 지낸 것처럼 편안해진 셰필드에서의 생활이 이제 막 두 달을 넘어섰다. 그토록 비일상적이던 것들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한국보다 일교차가 적고, 해가 일찍 지고, 비가 자주 내리고, 느슨해지다가 현실을 누락하기 쉬운 곳. 이곳에 머무르는 주중의 잔잔한 생활이 싫지 않다.
금요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면서 인생 최고의 츄러스도 사먹고, 뉴캐슬이라는 잉글랜드 북부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도 가고, 트램을 타고 셰필드 이케아도 다녀오고, 제아가 우리 플랫 주방에서 만들어준 요상한 고구마 맛탕도 먹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던 날에는 갑자기 화장실 타일을 모조리 박박 닦고 싶은 충동에 물티슈로 누래진 바닥 타일을 전부 닦고 변기와 세면대를 청소했다. 무료한 오후에는 한국어로 쓰인 편지들을 모조리 꺼내서 읽기도 했다. 생산적인 일을 하든 안 하든 내 마음 하나 편하고 즐거웠다는 이유로 “완벽한 하루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삶에 만족하는 일에 인색한 나보다 한참 그릇이 큰 제아가 한 말이긴 하지만…
요 며칠 가장 반복해서 읽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사람의 토막글을 옮긴다. 읽을수록 너무너무 좋다. 최근에 읽은 모든 글 중에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 2011년 10월의 가을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가을 단풍과 조용히 흐르는 물,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그곳에 인공의 오브제를 더 할 수 없어 그곳에 있던 모래밭에 간단한 이미지를 조각해 보았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돌멩이도 그 자리에 놓고… 아마도 며칠이 지나고 나면 바람이 내가 파헤쳐 놓은 흔적을 없애 줄 것이다. 나와 함께 모래를 가지고 놀던 한 소년은 “산자락” 같다고 했다. 그렇게 봐주니 그것도 좋다. 나와 내 작업도 시간이 흐르면 여기 있는 들꽃들처럼 그 피어있던 자리도 알 수 없을 때가 오겠지!
이 사람은 지금쯤 자신이 이런 문장들을 남겼다는 사실도 잊어버렸을 것 같다. 그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으므로. 신기했던 것은 이 글이 마치 내가 적은 것 같이 느껴진 일이고, 더욱 신기했던 것은 내가 그것을 아주 달갑게 느꼈다는 점이다. 이곳에 온 뒤로 정말 놀랍고 좋은 점 중 하나는 지겹도록 오래 생각해온 사람을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는 너무도 다르고 나를 잘 모른다 생각해온 어떤 어른에 대해서.
주말의 여유를 빌려 스무 살이 된 직후부터 올해 초까지 써두었던 글들을 읽어보았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문장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과 불안의 목록을 작성해나가는 일과도 같고, 살아있다는 것은 그 목록을 눈 깜빡 안 하고 응시하는 일.’이라는 문장이 묘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지금의 나라면 쓰지 않을 문장이었다. 차라리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위험에 빠질지를 고르는 일과도 같고, 살아있다는 것은 그 위험을 안고 사랑하는 일’이라고 쓸 것 같다. 그 위험이란 사랑도 될 수 있고 꿈도 될 수 있겠다. 기꺼이 오해받는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오해를 정정하거나 마음에 드는 오해대로 살아버리는 일, 그러다가 이따금 거짓말처럼 온전히 이해받는 일. 전부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간의 내 삶의 오류는 삶을 발명이 아닌 해명의 대상으로 여겨온 데에 있다. 해명하려 드는 버릇을 다 내버리진 못했지만, 이제는 내 삶이 해명이 아니라 발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삶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걸 몰랐었다. 외부로부터 오독되는 일에 괘념하지 말고 나를 찾아서 발명하는 일에 매진하면 된다. 살아있어야 한다면 이 문제를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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