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희극 같던 스위스

그리고 애증의 한국

2023.11.14 | 조회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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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1.13

 

스위스는 유럽 특유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난잡함과 지저분함에서 완전히 비껴 있는 정돈된 선진국이었다. 고요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아름다웠다. 아무 주택이나 가리키며 ‘저 집에 산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본인들은 알까’ 따위의 말을 싱겁게 해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동시에 ‘여기서 살고 싶다’라고 말할 엄두조차 안 나는 곳이기도 했다. 평생 산다 해도 영영 이방인일 수밖에 없을 것 같던, 눈앞의 매 순간 모든 풍경이 이질적이게 아름답고 모든 것이 값 비싼 나라.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아서 안 된다던 시구가 여행 내내 맴돌았다. 세민이와의 대화를 빌리자면 취리히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동안에는 잘 짜인 희극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평온하고 우아해서 작은 불안과 소음이 쉬이 허락되지 않아 오히려 평생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빈곤이라고는 경험해 본 적 없이 빳빳하게 펴진 백색 얼굴의 행인들에 스며들 자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스위스를 충분히 알아가기에는 짧기만 했던 3박 4일 동안 인터라켄 부근과 베른, 그리고 취리히를 여행했다. 비바람이 치고 운영하지 않는 곳이 많아 아쉬움이 깊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비수기였기에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이 있었다.

그린델발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유지혜 페이퍼를 읽다가 ‘한국이 내게 언제나 당연했기 때문에, 명절에만 봐도 되는 친척 같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라는 구절에 너무 찔렸다. 어쩜 이렇게 표현하지. 모국을 헤어질 수 없는 가족에 비유하고 타국을 불편한 신비감이 유지되는 연애에 비유하는 필력에 질투가 났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 멀어질수록 나다워진다는 그의 문장 역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힘든 이유는 땅덩어리가 작아서도 유럽만큼 아름다운 관광지가 많지 않아서도 아니다. 삶을 여행하듯 즐길 만한 것이 아니라 이겨내고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지하철을 메우는 유령 같이 텅 빈 잿빛 얼굴들, 눈에 불을 켜고 타인의 의견과 성과와 외모와 행동거지를 재단하는 착취적인 시선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옹졸하고도 한국적인 애티튜드. 융프라우와 인터라켄 유람선에서 심심찮게 한국인 관광객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반가움보다 거리낌이 컸던 것은 잊고 살던 그 피로감이 훅 와닿아서였다.

그린델발트와 융프라우는 지구인의 미적 기준을 전혀 모르는 외계인이 보아도 아름답다고 말할 것 같았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던지라 세민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떼기시장 같기도 했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짧은 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취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내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유쾌하기도 했다. 문득 여행을 하다가 화를 내거나 일행과 싸우고 연까지 끊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그 여행지에 다시는 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고 내일을 모르고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거다. 쉬이 오기 힘든 곳에서 최대한 좋은 느낌만 가져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일까. 스위스든 영국이든 제주도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 그리 화가 날 것도 없는데. 다시는 못 올 수도 있으니 최대한 즐기려는 현명한 조급함과 언제든 살면서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안일한 담대함 사이에서,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고만 싶다. 물론 이런 지리한 단상들을 모두 압도해 버리던 설산의 경치, 그 장엄한 풍경에 대한 감상을 압도해 버리는 듯했던 고산병의 고통이 더 오래 기억에 남겠지 싶다.

수채화 같아서 현실감이 없던 그린델발트와 융프라우보다도 가장 순도 높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베른에서 보낸 반나절이었다. 슈피츠를 구경하고 오후 세 시가 넘어 도착한 베른은 도시의 칙칙한 색감이 차분하고 고급스러웠다. 구불한 강을 끼고 짜인 독특한 구획의 시내를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아기자기한 동유럽 도시 같기도 하고 차가운 독일의 소도시 같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올드타운 곳곳에 지하로 향하도록 비스듬히 세워진 비밀통로의 입구 같은 문이 정말 귀엽고 독특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장미공원에서 내려다본 베른의 야경은 너무 아름다워서 골목골목을 찬찬히 바라보게 되었다. 다섯 걸음 걷고 멈추어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노래를 틀어두고 발걸음 가는 대로 걷다 닿은 연방 궁전 뒤뜰에서 내다본 베른 시내와 작은 공원도 좋았고, 우연히 보게 된 스크리닝 쇼도 사랑스럽고 기발했다. 그린델발트와 융프라우에서도 찾아오지 않았던 ‘다시 오게 될 것 같다’ 하는 느낌이 베른에서 찾아왔다. 밀도 높게 보낸 베른에서의 네 시간이었다. 지금은 새벽 열두 시 반, 셰필드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아무리 좋은 여행이었을지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본래의 거처로 돌아가는 길은 늘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유럽에 온 뒤로 해외여행과 외국 생활은 전적으로 다르단 걸 실감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이 나를 소진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생활의 즐거움은 나를 채워나감으로써 얻어진다. 그래서 석사든 워홀이든 취업이든 교환학생 이후의 외국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는 요즘이다. 안전감과 편안함에서 오는 친숙한 자유를 택해야 하나, 불안정함과 새로움에서 오는 낯선 자유를 택해야 하나. 한 곳에 머무는 일을 견디는 데에 있어 나는 역치가 높은 편은 아닌 것 같다.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와 글이 좋지만, 편안하고 익숙하고 안전하다는 이유로 한 곳에 고여 살다가 퍼뜩 ‘잘못 살았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될까 봐 두렵다. 한국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한국에서 멀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와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 사랑하는 오래된 거리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이방인으로 지내는 일을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확답이 안 난다. 지겨움보다야 외로움이 낫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어느 정도의 외로움까지 견딜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을 노릇이다.

박해받는 이국인처럼 처량해지다가도, 보름 묵은 빨랫감처럼 원래부터 여기 있던 듯 무던해지다가도, 데이지 꽃이 프린팅 된 포장지처럼 세련되게 빳빳해지는 하루하루. 그 속에 대단하진 않지만 묘하게 나를 웃음 짓게 하는 아주 작은 것들이 모여서 커다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작고 하찮은 고민만 해오다가 삶 전체를 쥐고 흔들 법한 고민을 하게 되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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