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7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서치를 하다 보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는 표현을 셀 수 없이 보고 듣게 된다. 나 역시 신나서 누군가에게 여행담을 이야기할 때면 ‘런던에서 오페라의 유령은 꼭 봐’, ‘스페인에서 세비야는 꼭 가봐’ 하는 말들을 뱉는다. 그러면서도 그 말을 주고받을 때 드는 묘한 거북함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어떤 곳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그곳에 가지 못하면 혼자만 멍청하게 여행하는 듯한 기분에 처하게 만들어서겠다.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말일 수 있다는 거다. 어디에서 어떤 우연한 행운과 불운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인 법이므로 어디가 좋았으니 어디는 꼭 가보고 어디는 별로니까 가지 말아라 하는 주제 넘는 말은 되도록 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그러나 그런 따끔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몇 번을 되뇌면서도, 포르투갈은 그렇게나 함부로 아무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였다. 에그타르트와 와인 만으로도 충분했던 미식의 나라, 지루한 고요를 그대로 두지 않고 버스킹 소리로 채워버리는 나라, 노을과 야경과 여유와 낭만의 나라.
포르투와 리스본에서의 나흘, 그중에서도 포르투에서의 이틀은 정말 못 잊게 좋았다. 셰필드 한국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 나더러 포르투갈을 콕 집어 가보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너무나 알 것 같다. 큰 기대와 정보 없이 도착한 포르투는 내 예상보다 아주 세련되고 친절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무언가를 사고 먹고 입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현지인과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으니 내가 소비자여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인지 이곳 사람들이 본래 친절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직원과 고객의 관계에서는 친절하던 사람들이 길가에서 행인 대 행인으로 마주쳤을 때는 ‘니하오’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포르투갈에서는 왜인지 그런 혼란한 의심 없이 사람들의 친절과 양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인종차별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유일한 여행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재치 있고 친절한 현지인들, 친근하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관광객들은 나를 이방인 대하는 눈으로 흘겨보지 않았다. 단 며칠 묵은 나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 루이스 다리와 세라 두 필라르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포르투의 야경, 모루 정원에 모여 앉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 아무도 앞에 서서 바라봐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꼿꼿하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전망대에서는 백예린 Popo를 틀어두고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오늘 서로 처음 만난 듯한 한국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내려왔다. 전애인의 엠비티아이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더라.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에 경사진 골목들이 참 많은데 그 좁은 비탈길 계단마다 조그맣게 낸 가게와 야외 테이블 자리들이 특히 사랑스러웠다. 사람들이 그 자리들을 메우고서 늦은 시간까지 누군가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밀조밀 계단에 자리를 낸 음식점들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던 중에 어떤 할아버지께서 벽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영문을 몰라서 당황했는데 멀찍이 보이는 수도원의 야경을 보여주려고 하신 거였다. 여러모로 포르투에서의 이틀은 달고 편안했다. 살면서 마셔본 와인 중 가장 맛있었던 테일러스 빈티지 포트, 언제 어디에서 사먹어도 달콤 촉촉하던 에그타르트, 입맛에 맞아 두 번이나 방문한 식당의 파스타까지 음식도 입맛에 잘 맞았다. 아직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을 가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섣부른 말이지만 유럽의 한 도시에서 평생 살 수 있다면 포르투를 고르고 싶다.
여행지에서는 현실적이고 익숙한 일상의 대화보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이 생경하고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여행자의 이미지에 부합하고 싶은 어쭙잖은 허세이겠지만... 세민이와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각자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민이의 대답을 들으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는 일은 대답의 주인을 미워할 수 없게 되는 일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내 대답에는 지금 이 시기가 꼭 포함되겠다. 내가 나라는 것이 괴롭기보다는 때때로 흥미로운 지금이, 나만 생각해버릴 수 있을 만큼 험난하거나 나에 대해 아예 생각지 않아도 될 만큼 멀고 넓은 지금이. 숙소에 돌아와서 영화 불한당을 봤다. 열 번도 더 본 영화인데 인생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이 뒤통수에서 온다는 대사가 영화의 맥락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삶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사건들이 대개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이 그다지 무섭거나 억울하지만은 않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도시를 사랑하게 될 수 있으므로.
하룻밤밖에 묵지 못해서 아쉽기만 했던 리스본도 참 좋았다. 경사진 길이 많은 것마저 싫지 않았다. 헥헥 대면서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 본 야경과 힙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던 타임아웃 마켓도, 바닷길을 따라 느긋하게 산책하던 것도,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숙소에 돌아와 잠든 세민이 옆에서 본 영화 노팅힐까지도 너무 좋았다. 다음 날 벨렘 지구에서 브런치를 먹고 나오면서는 “그냥 왜 이렇게 좋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들어가 보려 했던 수도원은 휴무로 문을 닫았고 날씨도 제법 흐렸고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었는데. 이 도시에서의 짧은 여행이 좋기만 했다. 발견기념비 앞에서 버스킹을 하던 아저씨는 포르투의 모루 정원에서 버스킹하던 아저씨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Hey What’s going on 하는 가사만 맴돌아서 검색을 해보니 4 Non Blondes의 What’s Up이라는 노래라 하네. 자주 찾아 듣게 될 것 같다. 여행 가서 기념품을 거의 사 오지 않는 편인데도 리스본에서는 엽서와 에그타르트와 와인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는 후련함보다 더 머물고 싶은 아쉬움이 설명할 수 없게 한참 컸다. 수하물 검색대 직원이 지퍼백에 욱여 넣어진 미니 테일러스 와인을 가리키며 “It’s really nice.” 하면서 웃었다.
포르투갈에서의 나흘은 너무 소중해서 잘 접어두고 가끔 펴보고 싶다. 여행을 하던 중에 앞서 언급한 이유로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교환학생 너는 꼭 갔으면 좋겠다’ 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해버렸네. 그게 무슨 마음인지 안다고 답장해주어서 마음 깊이 고맙다. 내게 좋으니 다른 누구에게도 꼭 좋으리란 법은 없는 걸 알면서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고 속내를 쏟아버리게 된다. 포르투갈에서의 행복감을 나누고 싶은 욕심이 섣부른 말을 허락해버렸다고 생각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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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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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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