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반짝반짝 그리울 세비야

El sol brilla para todos

2023.11.07 | 조회 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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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1.07

 

마드리드와 세비야에서의 45일이 끝났다. 스페인 특히 세비야는 너무나 관광지여서, 슬픔이 하나도 없어서, 내내 좋다는 말밖에는 나오지를 않아서, 결코 슬퍼질 수 없는 곳이어서 묘했다. 우습지만 고등학교 스페인어 시간에 스페인 영상을 보면서 저 나라의 우울한 사람들은 참 괴롭겠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이렇게 흥 많고 열정 넘치는 도시에서 홀로 절망하는 심정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와보니 그 생각이 또 들더라. 그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는 말이다. 세비야 사람들은 세비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그 말이 우습지만 아주 틀리진 않을 것 같았다. 가는 데마다 심어진 귤나무, 선명한 초록과 노랑과 파랑, 짭조름하고 다채로운 해산물 요리와 달콤한 상그리아, 골목골목 알록달록한 낮은 건물들, 저마다의 즐거움을 찾으러 온 관광객들과 통통 튀는 현지인들, 밤늦게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 한 사람 몫의 슬픔이나 고뇌는 이 역동적인 도시 속 기쁨의 총합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겠더라. 좋음이 과잉되어있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과분한 찝찝함.

세비야 첫날 본 메트로폴 파라솔에서의 야경은 정말 못 잊을 것 같다. 런던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 꼭대기에 올랐을 때도 했던 생각이지만 새로운 도시에 방문했을 때 그 도시를 구석구석 걸어보는 것만큼이나 높은 데서 한눈에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가보는 것도 정말 필요한 듯싶다. 그 도시에 무엇이 있고 건물들이 어떻게 생겼고 내가 어디 쯤에 서 있는지를 단번에 감각할 수 있다. 다만 현지인들은 메트로폴 파라솔을 주변 경관과 조화되지 못한 지나치게 현대적인 건축물이라고 생각할지, DDP나 잠실 롯데타워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듯이 이곳 현지인들도 상반된 생각을 지녔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쨌든 관광객인 나로서는 그런 것들이 궁금한 한편 높은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비야 시내 전경이 다 내려다보이는 그곳이 마냥 너무 좋았네. 노을 질 때 올라가 보면 또 새로울 것 같았다.

다음 날 히랄다 탑을 오르며 내려다본 세비야 대성당과 오밀조밀 모여 있는 건물들도, 타코벨을 포장해서 털레털레 오갔던 이국적인 에어비앤비도, 해 지는 과달키비르 강을 보려고 막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넜던 것도, 알카사르 뒤편의 먹물 빠에야가 맛있던 예쁜 식당도, 아쉬운 마음에 자정 넘어서까지 바 야외 자리에 앉아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눴던 시간도, 눈을 못 떼게 예뻤던 알카사르도 다 좋았다.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스페인이라 닷새 내내 경직된 채로 돌아다녀야 했지만, 정작 돌아보면 영국보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클럽을 제외하면 밤늦게 먹고 노는 문화가 거의 없어 컴컴한 영국보다 오히려 밤에 돌아다니기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다. 격식 없고 흥 넘치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영국과 스페인이라는 전혀 다른 두 나라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었다. 참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어서 음식 맛있고 거리가 반짝반짝한 스페인을 떠나 잔잔한 셰필드로 돌아오기가 싫더라. 숙소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제아가 한국 돌아가면 이렇게 여행 다닌 거 너무 생각날 것 같지 않아?” 했다. “난 벌써 힘들어라고 대답했다

몇 달 전쯤 유튜브에서 본 반복할 수 있어야 행복이고 그래서 여행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기억난다. 영상을 볼 당시엔 지극히 공감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경제적인 문제를 차치한다면, 원할 때 또 훌쩍 떠날 의지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까. 여행자처럼 살 수만 있다면 여행도 행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설령 같은 도시에 다시는 오지 못한다 해도, 어떤 경험은 몸으로 실행됨으로써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아 재생됨으로써 충분히 반복될 수 있다. 기억도 어떤 체험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귀한 기억을 갖고 사는 일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문장 하나, 깊은 인연 하나, 소중한 추억 하나씩 붙들고 살아지는 게 삶일 건데. 런던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들기 전에 갑자기 한국에서 가져온 편지 속 문구가 자꾸만 맴돌았다. 설령 인생이 누군가와 끝없이 멀어지는 과정이라 해도 너를 응원할 것이라는 말. 그 문장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이상한 점은, 멀어지는 만큼 가까워질 것만 같고 자유로워지는 만큼 더 많은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거다.

여행을 다녀올 때면 내 존재가 중력을 덜 받는 기분이 들어 좋다. 쉽게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고 크게 품 들이지 않고도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느낌이다. 한 달 전쯤 엄마가 영상통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있어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거야.”라고 말했는데 그 말투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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