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여행을 떠나지 않고 셰필드에 머무른 몇 주만의 주말이다. 방에 누워 혼자 영화 첫눈에 반할 통계적 확률을 보고, 윤리학 과제를 하고, 장을 보고 빨래를 돌리고, 스페인 여행 계획을 세우고, 미스 아메리카나를 보면서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고, 귀국 항공편을 예매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자꾸만 귀국 이후의 생활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다. 떠나려면 석 달 넘게 남았는데 당장 떠날 사람처럼 아쉽고 아득해지는 요즘이다.
잠 안 오는 새벽엔 영국을 떠날 때 조와 사쿠라에게 쓸 편지의 내용을 생각했다. 아무 것도 기약할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확실한 약속이 하나도 없어서 조금 쓸쓸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국에 다시 오게 되면 연락할게‘, ’일본에 가게 되면 연락할게’ 같이 하나 마나 한 희미한 약속. 그밖에 내가 할 수 있는 말들도 너무나 상투적이다. 그동안 고마웠어. 넌 좋은 사람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 너를 만난 건 행운이야. 잘 지내. 편지의 주인이 읽고서 진심이라고 생각해줄지 아니면 그냥 입 발린 말이라 여길지 모르겠다. 내가 미국인이나 중국인이었다면 ‘우리나라에 오면 연락해’라고 쓰는 일이 그다지 민망하지 않았겠지만 한국인이 ‘우리나라에 오면 연락해’라고 쓰기는 좀 민망한 데가 있다. ‘살다가 만약 한국에 올 일이 생긴다면 연락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여하튼 아쉬운 기억이나 아쉬운 사람이 생기는 일은 언제나 허하다. 이것은 지나가고 저것은 오려면 멀었고 지금은 잊혀 가고 우리는 내일을 모르니까. 내가 사랑하는 오늘이 내 마음을 알은 체 않고 여느 날처럼 휙휙 지나간다.
일주일 째 미뤄지던 생리를 시작했다. 몸에 힘이 없어서 수업도 빠지고 요며칠 밤마다 눈을 꿈뻑꿈뻑 했다. 정신이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몸이 정신을 통제한다.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균형 잡기의 연속인데 체력의 한계가 여러 모로 나를 휘청이게 한다. 주말을 끼고 다녀오는 여행과 주중의 학교 생활 사이에서 균형 잡기, 여행의 여운을 곱씹을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벅찬 스케줄일지라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곳에 가보자는 생각 사이에서 균형 잡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과 나홀로 걷고 말하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는 힘을 기르는 일 사이에서 균형 잡기. 내 페이스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는 믿음을 갖고서 어느 한 쪽으로도 너무 기울지 않고 싶다. 걸어야 할 때 걷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면서 하루하루가 주는 착상을 너무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곱씹으며 지내고 싶을 뿐...
물론 여긴 평생 살 곳은 못 된다. 혼자 새벽 산책도 나갈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곳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겠지. 곧 떠날 사람이라 모든 것이 좋게 보인다는 걸 안다. 그걸 아는데도 살다가 너무 그리워질 것 같다. 나쁜 것도 좋게 보이는 지금이. 케시의 summer를 듣는데 가사가 지금의 생활에 대한 내 마음 같았다. Three months is all we got, try not to fall in love. 3개월 쯤 남은 이 생활을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무섭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심보선 이북 시집을 읽던 중에 곱씹을수록 공감 가는 구절이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자꾸만 바보처럼 지나가버린 어제의 일이나 오지도 않은 내일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본래 형벌이고 지금 잠시의 생활은 몇 개월 뒤면 깰 단 꿈이라는 생각이 맞을까, 삶이란 본래 선물이고 이따금 괴로운 사건들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맞을까. 전자가 맞다고 굳게 믿어왔는데 이런 질문에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다. 빈곤, 질병, 폭력, 실연, 이별 그런 것도 다 삶인 건데 나는 자꾸만 후자가 맞다고 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삶은 아름답다 따위의 문장이 아주 틀리진 않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삶이 형벌이라는 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리하기가 어렵다.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sunrin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19)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