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7
하루가 정말 길었다.
어젯밤에는 방음도 잘 안 되고 한국인 후기도 없는 다락방 느낌의 에어비앤비에 묵는데 무서워서 한참 뒤척였다. 일주일만에 혼자 자는 밤이라 마음이 편하면서도 덜컥 무서운 기분이었다. 쓸쓸하다, 외롭다, 막막하다 이런 마음이 아니고 그저 실체도 없는 무섭단 감각이 대책 없이 압도해오는 느낌이었다. 진아에게 디엠했더니 남아 있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네. 옆방에 묵는 아저씨가 내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상상도 해보고, 자고 일어났더니 처음 보는 곳에 버려져 있는 상상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두꺼운 이불 속에서 어젯밤과 다를 바 없이 일어났다. 몸이 긴장해 있으니까 벌떡 일어나지는 건 좋았다. 될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큰 캐리어를 공용 거실 소파 옆에 던져놓고 작은 캐리어와 백팩만 가지고 올라가서 다락방에서 묵었는데 다행히 아무도 훔쳐가지 않았다. 안 쓴 것처럼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서 어젯밤에 미리 깔아놓은 우버로 인생 첫 우버 택시를 불러 타고 기숙사에 도착했다. 반 년을 지낼 거처로 가는 길이 적잖이 들떴다.
런던 기차역부터 셰필드 에어비앤비를 거쳐 기숙사까지 짐을 끌고 혼자 오는 길이 너무나 고단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순조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내 것을 탐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고함 치지 않았고, 아무도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사소하게라도 도움 줄 일들이 있었으므로. 몸살 기운도 안 가셔서 온몸이 뻐근했는데 기숙사 방문을 처음 열었을 때는 다 잊히는 것 같았다. 내 한 몸 뉘일 곳 있고 없고가 정말 큰 차이더라. 안도감, 안정감, 안 죽고 안 다치고 안 잃어버리고 안 주저앉고 도착한 내 자신에 대한 기특함이 다른 어떤 막막함보다 컸다. 살아가는 데 연비가 딸리는 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런던을 떠날 때 에어비앤비 호스트님이 안전한 여정이 되길 기원한다고 말해주셔서 잘 도착했는지도 모르지만.
기숙사에 도착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조금도 지체 없이 샤워 커튼을 달고 진드기 시트를 붙이고 매트리스 커버를 씌우고 책상과 선반을 닦았다. 천운처럼 만난 한국인 플랫메이트 수민이와 카페에서 점심도 먹고 빨래바구니와 이불을 사들고 왔다. 짐을 다 정리하고서 찾아온 평화를 좀 즐기다가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혼자 이것저것 사러 나갔다. 바람은 엄청 불고,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내가 어디서 무얼 사고 어디를 걷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홀가분했다. 마트에서 핸드워시, 휴지, 올리브 오일, 달걀, 사과, 딸기잼, 카레맛 라면, 빵 등을 사서 돌아왔다. 저녁으로 플메 수민이와 간장계란밥과 미역국을 먹고, 우리 플랫 단체 채팅방도 만들고, 바닥 청소도 하고, 포르투갈에 있는 주혜랑 이런 저런 연락도 하고, 내일 사야 하는 물품 목록도 정리했다. 하루가 정말 길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새롭고 어색하고, 영어도 눈과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모든 순간이 살얼음판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서 피로하지만, 또 그만큼 세상이 넓어지고 있겠다는 설렘이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다가도 거짓말처럼 움츠러드는 나를 발견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런던 에어비앤비 호스트님께서 엄청 예쁜 하늘색 티팟에 우려주셨던 스트로베리 민트 티 정말 향긋하고 최고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온다. 왠지 살면서 다시는 못 마실 것 같다. 앞으로도 당분간 살면서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할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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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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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19)
ㅠㅠ 보고시푸다 지유야 안전하게 지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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