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런던을 떠나며

Can you take service charge off please?

2023.09.16 | 조회 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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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09.15.

 

벌써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간 건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하면 꼭 감탄할 일이 한 번은 생기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주 고단하고 찬란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제는 자다가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세민이가 누워 있어서 놀랐다.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세민이와 내가 런던에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현실감 없게 느껴진다. 아직도 구글맵이 아니라 네이버 지도 앱을 잘못 들어간다. 적응하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려나.

여행 첫날 런던탑을 지나 템스 강가를 걸으면서 한국 돌아가기 싫다고 말했었다. 그런 마음은 익숙해지면 들 줄 알았는데. 여긴 정말 넓고, 넓고 무심한데 때로는 다정하고, 그런 것들이 일회용 친절이라는 사실이 무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딱히 슬프지도 않다.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잠들고 자유롭게 입고 자유롭게 먹고 자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내가 묶어두었던 케케묵은 생각들이 하나도 중요치 않게 느껴진다. 이렇게 넓은 도시, 이렇게 나를 매료시키는 음악, 이렇게 여유로운 사람들, 이렇게나 다양한 체형과 인종과 패션과 걸음걸이.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입은 옷과 내가 먹는 음식에 아무 관심이 없다. 다른 세상 같은 이곳에서 무지 외롭고 무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웅장한 타워 브릿지, 런던탑, 노을 지는 트라팔가 광장, 웨스트엔드 거리, 장엄한 세인트 폴 대성당, 낭만적인 소호 거리, 드넓은 하이드 파크, 내셔널 갤러리, 빅벤, 런던 아이, 독특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 못 잊을 오페라의 유령, 버로우 마켓, 캠든 거리…. 관광지들 전부 좋았지만, 첫날 시내를 발 닿는 대로 걸었던 것이 충격적이게 좋았다. 어떤 장소를 제대로 알려면 그 장소를 걸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더 확신을 얻었다. 첫날만 이만 사천 보를 걸었다. 그 뒤로도 오늘을 제외하면 매일 만 오천 보 이상을 걸었다. 닷새 내내 당혹스러운 일이 매일 하나 이상 생겼지만 고된 걸음걸음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런던은 아주 다정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다가도 아주 이중적이고 기만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식당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테이블에 앉으면 무례하다고 여기면서 무단횡단과 길거리 흡연은 아무렇지 않게 용인하는 알 수 없는 도시다. 그러면서도 바닥에 담배꽁초가 더럽게 버려져 있지 않은 것도 신기하다. 정갈하게 전시되어있는 약탈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보기 위해 나를 비롯한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광경도 사뭇 미묘했다. 이곳의 많은 것이 모순적이라고 느꼈지만 화 많고 정 많은 한국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나는 이곳을 잘 모른 채로 떠난다. 잘 모르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사랑하게 된 이곳을 잘 모른 채로 떠난다.

오늘은 몸살감기 때문에 병원도 다녀오고 종일 골골댔다. 정말 아프고 싶지 않았는데 영국에 온지 닷새 만에 아프다.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니까 피로해져서 그런 것이겠지. 그렇지만 이 피로도 아무 때나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피로가 아닌 걸 안다. 벌써 영국에서 보내는 첫 주가 지나간다. 전부 다 쥐고 있을 새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쉬울 일주일들이 고작 열아홉 번밖에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돌아가기 싫어질까봐 내 간사한 마음이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우려 그대로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고 싶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왔는데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너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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