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별것도 아닌 것에 고맙다, 미안하다, 괜찮다, 나이스하다, 쿨하다, 러블리하다는 말을 주고받는 이곳은 지낼수록 신기하다. 긍정성이 과잉되어 있는 언어문화가 좋기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나를 지치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되는 건 분명하다. 스시집 일할 때 늘 계산하고 나가시는 길에 “행복한 하루 되세요” 하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들을 때마다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동을 받았었다. 한국에서는 뱉는 데에도 듣는 데에도 품이 많이 드는 그런 한 마디가 여기서는 너무나 상투적이다. Have a nice day. You too. 아까는 밤 열두 시쯤 씻고 나와서 환기하려고 잠시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워 창문을 닫으려고 내다보니까 길에서 떠들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하데. 그래서 나도 홀린 듯이 손을 흔들었다. 화가 나려다가도 다들 참 해맑아서 화가 나지지도 않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배가 고프면 밥을 짓고 해가 쨍쨍하면 손수건을 챙기듯이 사는 거,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 해야할 가장 적합한 일을 명확하게 처리해 내는 것이 참 어렵다고 생각해왔는데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 나도 그런 식으로 살아진다. 지극하게 현실적이어지고 씩씩해지고 사고가 군더더기 없이 명료해진다. 딱히 그런 걸 원한 적도 없는데. 슬픈 말도 잘 써지지 않는다. 돌아갈 날을 기대하거나 걱정하기에도, 생각보다 시시하다면서 냉소하기에도 너무 이른 지금이다. 진아가 선물해 줘서 챙겨 온 시집의 ‘구월’ 첫 구절이 꼭 내가 보내는 편지같이 느껴진다. 당분간 슬픈 시는 쓰지 않을게. 영혼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을게.
오늘은 학생회관에서 동아리 홍보 부스를 돌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차, 균학, 포켓몬, 와인, 해부학 동아리 등 별별 특이한 동아리들도 있고, 사회학, 철학, 마르크시즘, LGBT+, 페미니스트,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노동자 학생 동아리 등 진보적인 색채를 띠는 동아리들도 성향별로 무지 다양했다. 동아리의 설립과 활동, 입부와 탈퇴도 아주 자유로운 듯하다. 원래도 중앙동아리인 정정헌 회장을 맡는 동안 우리 학교의 경직된 동아리 관리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들이 많았는데 그런 불만이 더 짙어졌다. 특정 동아리의 제명 심사 권한이 왜 다른 동아리 대표자들에게 있는지, 정치적 색채가 짙은 동아리들은 그런 심사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왜 함구되는지, 동아리 대자보에 왜 학생지원팀의 허가 도장을 받아야 하는지, 동아리 인준 시에 학생들이 왜 다섯 개 이상의 학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 등. 한국은 한참 멀었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런 기회들이 귀하게 느껴지더라.
여하튼 도착한지 겨우 닷새 된 이 도시가 벌써 꽤 익숙해져서 금세 지루해질 것 같다. 엄마도, 언니도, 남자친구도 나더러 금방 적응한 것 같아 보인다고 한다. 오늘은 동아리 홍보 부스를 다 돌고서 혼자 시청 앞 가든에도 가고, 빈티지 옷 가게도 들러 보고, 이것저것 장도 보고, 미트 파이랑 커피 마시면서 사람 구경도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했다. 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 보는 풍경 앞에 서는 것보다도, 먼 타지의 1인실에서 홀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진정 좋다. 혜린이가 교환학생 기간 동안에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다고 했는데 그걸 실감하고 있다. 어제는 옆방 친구 수민이의 생일이어서 작은 선물과 편지를 주었는데 새벽에 ‘우리의 세상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어’라는 문장을 답장으로 받았다.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기도 한 그 문장을 몇 번 들여다보고 읽었다. 모든 것이 가능성의 문제라는 점이야말로 생의 가장 경멸스러운 지점이면서 가장 다행스러운 지점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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