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
목요일에 서연이와 서울역에서 헤어지고 부암동까지 걸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You are in love를 반복재생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너무 좋았다. 이제 헤드셋 끼고도 걸을 만한 날씨가 됐다. 시청 앞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신호등이 15초 남았을 때 건너갈 수 있는 횡단보도인지 아닌지 가늠할 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돌이켜보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그런 식으로 영국에 가서도 하루하루 살다가 정신 차려보니 사는 법에 노련해져 있는 때가 오면 좋겠다. 익숙해져 있는 삶의 작은 요령들을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것으로 익히기 시작하는 기분이다.
지금은 한국도 영국도 아닌 곳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옆자리 커플은 손깍지를 한 채 잠들어 있고, 창밖은 내내 밝고, 승무원들이 트레이를 들고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헤드셋에서는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흘러나오고 있고, 전날 밤을 새웠더니 정신이 몽롱하고, 적당히 배가 부르다. 아까 기내식을 받고서 갑자기 생전 해본 적 없는 식전 기도가 하고 싶었던 걸 생각하니, 익숙한 곳에서 발을 떼면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식사를 마치고서는 평소의 나라면 보지 않았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끝까지 봤다. 마지막 키스 장면 직전에 피터가 ‘나 상처 줄 거야?’라고 물었는데 라라 진이 대답하지 않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은 애정만큼이나 상처를 주고받을 용기를 내는 일이기 때문일까.
출국 전날 책 한 권은 가져갈까 싶어 『모순』을 챙기려다가 말았었다. 삶의 등대 같은 책이지만 이미 많은 문장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마음속에 새겨져 있으니 상관없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그런 귀한 문장을 되뇌며, 소중한 기억이 늘어갈수록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오랜 모순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이제 세 시간 뒤면 히드로 공항에 도착이다. 반년간 낯선 땅에서 안 하던 짓들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달라질지 또 얼마나 지독하게 그대로일지 궁금하다. 해리포터를 한 편도 보지 않은 나도, 축구의 치읓 자도 모르는 나도, 수도가 런던이라는 것 말고는 영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영국을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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