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나 홀로 니스

햇살이 외로움을 녹여주는 곳

2023.12.05 | 조회 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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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2.04

 

니스에 도착한 첫날은 이상하리만치 두렵고 무서웠다. 혼자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매했던 내가 너무나 안일하게 느껴졌다. 날이 흐리고 어두워지니 도무지 식당에서 혼자 식사할 자신도 없어져서 샤갈 박물관만 돌아본 뒤에 마트에서 산 빵과 생수로 저녁을 때웠다. 무시당할까봐 지레 겁 먹고 감사하다는 말마저 숨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메흐씨...‘ 했다. 프랑스의 인종차별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서 더 움츠러들었던 것도 같다. 내 몸 하나 누울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1박 오만 원이 채 안 되는 싼값에 예약한 에어비앤비의 헐거운 문과 방음 안 되는 벽, 자꾸 어딘가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이 나의 불안함에 한 몫을 더했다. 프랑스까지 와서 처량하게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우습고 초라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칭찬하던 니스에서 바보처럼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에 돌아가는 항공편을 충동적으로 알아볼 정도의 불안함과, 나흘 안에 꼭 정을 붙여서 아쉬운 마음 안고 떠나겠다는 씩씩함을 동시에 안은 채로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 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숙소를 나섰다. ‘니스야, 오늘은 꼭 내 마음에 들어줘…’ 하는 마음이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햇살에 반짝이는 니스 해변과 파란 하늘, 거리에 늘어선 야자수를 마주했다. 어제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다는 머쓱한 확신이 섰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던 바다였다. 해변가를 따라 걷는데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셀카를 찍고 계시던 이탈리아 할아버지께서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니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산레모라는 도시에서 오셨다고 했다. ‘아이 러브 코리아’ 하시길래 흔한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는데 소맥, 해녀, 제주, 한국 전쟁, 일제 강점기를 알고 계셨다. 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면서 보여주시길래 찬찬히 보니 한글 ‘아’였다. 유럽에서 만난 서양인들 중 가장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불쑥 내게 국적을 묻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을 마구 쏟아내는 사람을 만날 때면 물은 적도 없는 본인의 스테레오타입을 펼쳐놓고 자랑하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데 산레모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그저 반갑고 신기했다.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본인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더니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셨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면서 바닷가를 따라 걷다가 전망대를 올랐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아무 대화를 하지 않는데도 “여기 정말 예쁘지 않나요?”라는 말을 암묵적으로 주고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후에는 니스를 속속들이 다 걸어볼 생각으로 해가 질 때까지 시장 거리, 마세나 광장, 대성당, 구시가지를 발 닿는 대로 걸었다. 문득 ‘여기 참 좋다’, ‘여기 되게 삭막하다’ 하는 동행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지 않고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니스를 감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 여행에 더 큰 책임감을 갖게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정감 있는 골목들을 조용히 걷는 일이 적당히 외롭고 아주 편안했다. 한참 걷고 쉬고 하다 다섯 시가 될 때쯤 일몰을 보러 해변으로 돌아갔다. 바닷가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이 본인은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는 바다보단 산이 좋아서 내일은 내륙 쪽 소도시에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천 출신이라던 그분은 탁 트인 바다를 좋아하고 어릴 적에 양평 산골에서 살았던 나는 초록 우거진 곳을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신기했다. 어떤 장소 위에서 사람의 기억, 감정, 취향, 성정이 조형되는 과정은 참 신기하다. 살아온 환경이 알게 모르게 향수가 되어 한 사람에게 미치는 힘이 어디까지일까. 저녁으로 바다가 보이는 ‘Nice Sunset’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와 파스타를 먹고 밤 바닷가를 걸었다.

셋째 날은 니스 근처의 많은 소도시 중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가던 생 폴 드 벙스에 가기로 했다. 니스에서 기차와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동화 같은 작은 마을. 버스에서는 꼭 오른쪽 좌석에 앉아서 풍경을 보라던 블로그 글을 잊지 않아 다행이었다. 샤갈이 사랑한 마을답게 골목골목 작은 갤러리와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돌담 너머의 탁 트인 푸르른 도시 전체가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파스타 하나에 삼 만원이 넘는 물가에 제대로 된 식사는 포기했다. 에스프레소를 사서 생수병 안에 붓고 따뜻한 햇살 아래의 벤치에서 빵과 함께 끼니를 때웠다. 자체 제조한 구린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마저도 귀하더라. 한두 시간이면 다 둘러볼 마을을 세 시간 넘게 걷고 들여다 보았다. 내렸던 정류장에서 두 정거장 정도 아래에 있는 곳까지 산책을 했다. 우연히 들어간 휴무 중인 아트샵의 야외 의자에 햇살을 등지고 앉아 쉬어가기도 했다. 니스에 돌아와서는 버거킹에서 너겟과 감자튀김을 포장해 숙소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에 걸음을 서둘렀는데, 걷다 보니 쟝 매드썅 가의 밤거리가 너무 좋아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트램 길을 따라 탁 트인 거리를 둘러보고, 마세나 광장을 지나 바닷가까지 느리게 산책을 했다. 가만히 서서 버스킹을 구경하면서 버스 요금 내고 남은 동전을 팁 통에 놓았다. 떠나려니 역시나 아쉬워진 니스에서의 마지막 밤, 따끈하게 안고 가던 버거킹 봉투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해변가의 파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소문과는 달리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거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니스에는 참 많았던 것 같다. 사람들의 해사함과 여유로움이 나의 외로움을 틈틈이 녹여주었다. 오늘은 영국으로 돌아갈 일을 너무 아쉬워 말라는 듯 다시 날씨가 궂어지고 비가 내렸다. 쇼핑 센터의 카페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공항으로 향했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전에 없던 대단한 깨달음이나 색다른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은근한 기대는 역시나 환상이었다. ‘이곳에서 뭔가를 얻고 싶었던 알량한 욕망’이라는 김사월의 가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나 한 가지 아주 묘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혼자일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혼자가 되어서야 ’누군가와 함께 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런 간사한 사고방식이 밉기도 하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혼자여서 더 두근거렸고 외로웠고 따뜻했고 두려웠고 반짝였던 남프랑스에서의 나흘을 뒤로 한 채 런던에 도착해 있다. 축축하고 쌀쌀한 공기가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는 희한한 도시다.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노래의 제목이 ‘아주 추운 곳에 가서야만 쉴 수 있는 사람’이네. 이제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는 셰필드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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