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사흘 앞두고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2023.09.07 | 조회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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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09.07

 

5개월뿐인 교환학생인데 5년 못 보는 사람인 양 배웅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다. 진 빚이 부쩍 너무 많다. 읽다 만 『해가 지는 곳으로』 초반부의 어떤 문장을 나도 모르게 되뇌는 요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지금은 헤어져도 언제든 한자리에 다시 모일 수 있으리라 다짐하던 순진한 기만.’ 도무지 순진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싫지가 않다.

그제는 진아를 만났다. 한 달 전쯤 느닷없이 몽골 사막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떠올라서, 고등학생 때부터 몽골에 가고 싶다고 했던 진아에게 말했다. 방금 준 편지에 사막에 대한 언급이 있다면서 진아가 소름 돋는다고 말했다. 몽골 사막 얘기를 마지막으로 나눈 게 벌써 삼 년 전인데. 신기해서 헛웃음이 났다. 귀갓길 열차에서 못 참고 편지를 꺼내 읽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찍은 학교 동기 사진을 보고서 문득 내가 사막에 가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좋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백은선 시인이 알레고리는 슬픔의 장르라고 했던가. 근데 이럴 때는 아닌 것도 같다. 사막에 가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다행이다. 알레고리는 실은 환희의 장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이상하게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라는 문장이 맴돌아 검색해 보니, 고등학생 때 노트북에 저장해두고 읽었던 진은영 시인의 ‘멜랑콜리아’였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내가 외국에 아예 눌러 살진 못할 거라고 생각해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어가 좋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지내고 싶기 때문이었는데, 정확히는 모국어를 사용할 때에만 지극하게 들어맞는다고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대화의 핀트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한편 정진아와도 이예원과도 의도찮게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을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와의 대화든 간에 핀트란 건 사실상 애초부터 맞았던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꼈다 한들 서로의 관념이 들어맞은 것이 아니라, 나의 관념이 너의 발화와 들어맞았을 뿐인 것이다. 부단히 노력해도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네가 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조금씩 어긋나는 대화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대화의 핀트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이유로 누군가의 손을 영영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기도 하거니와.

모든 질문에 명료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 아무 질문이나 툭 던져도 명쾌한 답이 나와 버리는 사람은 조금 무섭다. 근데 한편으론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무서움이 아니라 부러움인지도 모르겠다. 어젯밤에 남자친구에게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들은 다 참았는데, 언젠가 다 해버릴 것 같은 그런 말들은 다 참았는데, 그게 무슨 말들이었는지 다 까먹어버렸다! 그저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것이 내 속내의 팔 할쯤 되는 듯하다. 여하튼 다른 행성도 다른 차원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 잠깐 다녀오는 거면서 삶을 재시작하기라도 하는 듯 청승을 떠는 것 같아 우습지만, 어디에서 지내든 모두들 저마다의 치졸하고 알량한 욕망들을 좇으며 살아가겠고, 나도 그러하겠고, 자유롭다는 착각이 얼마든지 나를 허락해준다. 내가 누굴 찾아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누가 나를 찾아주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날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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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차빙수앙금새알

    0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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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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