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2.
유럽에 온 뒤로 선진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가 무의미할 만큼 사람들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이뤄져 있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해서다. 반세기 동안 다른 어떤 나라보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에서 살아왔기에 더욱 이 단어를 정의하는 데에 혼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대주의 혹은 자문화 중심주의적인 맥락으로도, 성장주의 혹은 경제주의적인 목적으로도 안이하게 남용되는 이 막연한 단어를 최대한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여전히 어떤 나라가 선진국인가를 명료하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흘간의 암스테르담 여행은 나로 하여금 네덜란드를 선진국이라고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잔세스 칸스의 노을 지는 풍차 마을, 운하 크루즈에서 본 도심의 야경, 반 고흐 미술관의 처연하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정말 좋았지만 가장 놀랍고 부러웠던 것은 도시의 풍경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자전거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선 늘 자전거 탄 사람을 보면 소매치기일까 봐 가방을 붙들었는데 자전거를 탄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그저 건실해 보였다. 국민 자전거보유율 1위라는 이 나라의 수도를 걸으면서 왜 선진국을 GDP 수치로 한정할 수 없는지를 느꼈다. 수많은 자전거들을 고려한 도로 구획과 교통관리, 자전거를 일상화하는 검소한 국민성, 자전거 이용과 관련한 교육적 법적 제도적 시스템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나 싶다. 자전거 이용이 대중교통의 쾌적함과 시민들의 일상적인 이동성에도 영향을 줄 것을 생각하니 더 좋은 문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아니고 자전거가 선명하고 상징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모습이 여러모로 신기했다. 낭만화되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게 보였던 풍경은 그래서 더 낭만적이었다.
가는 데마다 보이던 자전거만큼 기억에 남는 건 대마 냄새가 진하게 풍기던 홍등가. 교환학생 생활 시작 이후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을 꼽으라면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겠다. 그것이 안도감만큼이나 큰 무력감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사회적 선, 연대, 정의 따위를 삶의 중요한 축으로 두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그런 문제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바쁘고 기쁘고 슬프고 선량하고 충만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거, 그것이 바람직하든 바람직하지 않든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왈가왈부 비난할 자격이 누구에게도 없다는 거. 그것을 온몸으로 지각하면서 아주 큰 무력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며 크고 작은 실천들을, 이를테면 윤리적인 고민이나 지향이 반영된 세심한 전시, 시위, 낙서들을 만날 때 아주 귀하게 느껴진다. 성매매 합법화 국가인 네덜란드 성 노동자들의 삶과 역사를 알 수 있었던 홍등가 코너의 작은 박물관은 그런 실천 중 하나였다.
박물관은 암스테르담 성매매 산업 현황이 어떠한지, 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단순화되어 있는지, 그들의 일상이 어떠하며 어떤 계기로 성매매 산업에 들어서게 되는지, 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착취되고 폭력에 노출되는지를 담고 있었다. 성 판매를 비범죄화해야 성 노동자에 대한 낙인이 사라지고 성매매 과정에서의 폭력과 강압을 고발하기 쉬워진다는 기존의 생각을 전시의 많은 대목에서 재확인했다. 한편으로는, 청결하고 안전한 섹스만이 허용된다는 점, SM 플레이나 트랜스젠더와의 섹스 등 다양한 성매매가 이뤄진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어딘가 기만적이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리창 너머 불특정 다수의 시선에 노출된 성 노동자들을 보면서는 성 노동과 성매매 산업구조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관음적이고 위계적인 폭력성이 섹스 과정에서의 에티켓이나 안전 준수만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렇지만 성매매가 관광화되어 있는 곳에서 섹슈얼리티를 대상화 혹은 희화화하는 전시를 기획하지 않고 성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성매매를 이해하도록 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전시의 마지막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인 비밀을 적어 붙여놓은 메모들로 가득한 코너였다. 그 중에서 ‘My mom was a sex worker in Amsterdam. I came here 30 years later to see how she lived.’라는 메모는 왜인지 읽자마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해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여하튼 자전거와 아름다운 건물들로 빽빽한 도시에서의 천진했던 감상에 대비되는 홍등가에서의 복잡한 단상들이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다. 여행을 마치고 이동진 유튜브 영상을 보던 중에 박찬욱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라는 대사를 알게 되었다. 왜인지 그 대사가 암스테르담을 떠올리게 했다. 모순적이면서도 일관적이었던 암스테르담은 상충하는 듯한 두 진술 사이에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를 넣은 그 대사와 잘 어울린다. 자전거 이용이 기후 위기와 속도주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안일한 희망, 성매매 합법화가 성 노동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안일한 희망은 버려. 그래도 힘은 내보자는 거. 그런 점에서 네덜란드는 이제껏 다녀본 여행지 중 선진국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던 나라였던 듯싶다. 긍정적인 내일에 대한 대단한 확신 없이도 힘을 낼 수 있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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