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런던보다 에딘버러

따뜻한 겨울이 다시 돌아왔어

2023.12.27 | 조회 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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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2.24

 

영국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확답이 어렵지만 에딘버러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다. 에딘버러는 런던, 셰필드, 요크, 노팅엄, 맨체스터, 나스보로, 헤로게이트, 뉴캐슬까지 이제껏 가본 영국의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가장 현대적인 것과 가장 전통적인 것이 뒤섞여 장조와 단조를 오가는 역동적인 도시가 런던이라면, 에딘버러는 차분하고 아름다운 단조의 멜로디가 일관되게 이어지는 도시였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라는 게으른 표현을 쓰고 싶지 않은데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도보로 이틀이면 웬만한 관광 스팟과 주요 거리들을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옛날 건축물들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세련되면서도 포근했다. 여행객들로 꽤 북적이는 관광 도시임에도 소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민이와 암스테르담에서 에딘버러로 넘어온 뒤 늦은 밤 공항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처음 오는 도시인데도 다른 나라에 있다가 영국에 도착하니 그 안정감이 정말 컸다. 벌써 영국에 돌아올 때 내 나라에 돌아오는 양 편해졌다는 게 참 신기하다. 에딘버러 스콧 기념탑과 크리스마스 마켓, 뉴타운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일 하루가 기대된다는 말이 자꾸만 나왔다. 도착한 숙소는 작은 스코티쉬 올드펍 옆에 위치해 있었다. 구글맵 리뷰가 좋지 않아 기대가 없었는데 ‘Have a great stay in Edinburgh’라는 메모와 함께 정갈하게 포장된 과자들과 포근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를 확인해보니 우리가 떠나온 암스테르담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에딘버러는 우리가 머무는 날까지 비가 오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거짓말처럼 운이 좋았다. 암스테르담에서부터 함께 많이 웃고 더 가까워진 수민이와 또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실없는 대화로 새벽까지 떠들었다. 

이튿날 오전 숙소 앞의 목도리 가게들을 구경하고 스코티쉬 브런치 가게로 향했다. 예쁘기로 알려진 빅토리아 스트리트 건물들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거리를 비추었다. 포르투에서 그랬듯이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들떴다. 버섯이 특히 맛있었던 브런치로 식사를 마치고 에딘버러 캐슬을 두세 시간 둘러본 뒤 해가 지기 전에 칼튼 힐로 향했다. 날이 맑아서 선명한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몇 걸음 올라서자 에딘버러의 올드타운 뒤편으로 지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말대로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었다. 농담으로 수민이와 ‘내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걸까’ 말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스코틀랜드에서 또렷하고 그림 같은 석양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칼튼 힐을 내려와서는 제아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기프트 카드를 쓰기 위해 카페에 갔다. 수민이는 따뜻한 토피넛 라떼, 나는 헤이즐넛 핫초코를 시켰다. 카페에서 숨을 돌리면서 문득 여행이 이렇게 조금의 어긋남 없이 순조롭고 안온하게만 이어져도 되는 건가 싶었다.

해가 진 뒤엔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면서 친구에게 선물할 양말을 몇 켤레 샀다. 그리고 아침부터 눈에 밟히는 목도리를 사러 갔다. 이미 목도리를 두 개나 갖고 있는데 새 목도리를 사는 것이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는데, 에딘버러 캐슬 근처에서 본 모자를 안 산 것을 15년이 지난 지금도 후회한다는 엄마의 카톡을 보고서 마음을 굳혔다. 가게에서 수민이와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을 추천해주었다. 편안하고 즐겁고 순간순간이 재미 있었다. 3개월 된 친구와의 여행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코드가 잘 맞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웬만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잠시라도 들게 마련인데 며칠의 여행 동안 함께일 때 배로 좋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각자 마음에 드는 목도리를 골라 산 뒤 가게를 나섰다. 펍에 도착해 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밀도 높은 이야기들을 한참 했다. 지금 이 교환학생 기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무엇이 불안하고 무엇이 다행인지, 지금까지 다녀온 여행지들이 어땠는지, 좋아하는 칭찬이나 싫어하는 칭찬이 있다면 무엇인지, 어떤 부류의 사람이 좋고 싫고 되고 싶은지. 농담과 진담을 관통하며 진심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행 마지막 날 낮에는 창밖으로 캐슬이 보이는 카페에 들렀다가 딘 빌리지에 갔다. 고즈넉하고 귀여운 건물들이 보이는 다리 아래로 하천이 흐르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찬찬히 둘러보고 시내로 돌아와 위스키샵을 구경한 뒤 기차역 근처에 짐을 맡겼다. 그리고 홀리루드 공원으로 가는 길목의 라멘 집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수민이가 ‘잠깐 칭찬 타임 가져도 돼?’ 하더니 내가 본인이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라고 했다. 평생 들어본 적도 없고 듣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말이라 과하게 민망해져서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유치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어떤 말들은 듣고 난 후에야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서라기보다는 그 말이 정말로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는 것이 참… 좋았다. ‘야 너두 좋은 사람 될 수 있어’ 하는 말로 독려받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홀리루드 공원에서 험난한 등산까지 마친 뒤 기차를 타고 셰필드로 돌아왔다. 런던에 처음 도착했던 9월부터 엄마가 에딘버러는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라면서 꼭 여행해 보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었다. 그 말을 듣고서도, 잉글랜드도 잘 모르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는 기회가 되면 가고 아니면 말고 하는 정도의 여행지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스코틀랜드는 닷새 중 사흘은 비바람이 치는 날씨였기에 여행 타이밍을 잡기도 어려웠다. 안 가보면 왠지 후회를 할 것 같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고른 여행지였는데, 도착하자마자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나 싶었다. 밤 열한시가 다 되어 셰필드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둘이서 비빔면 끓여 먹으며 ‘이게 행복이지’를 외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래 걷고 많이 웃은 에딘버러가 한국에 가면 정말 많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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