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아일랜드는 영국에서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라는 사실만으로 설렜다.
엄격한 기내 수하물 검사로 악명 높은 맨체스터 공항을 겨우 떠나와서 한 시간 만에 도착한 더블린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입김이 났다. 영국보다 좀 더 조용하고, 슴슴하고, 맑고, 러프하고, 그러면서도 친절하고, 추웠다. 기네스와 위스키의 나라여서인지 식민지 역사의 한이 서려 있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인데도 찐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왜인지 내적 흥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가라앉아 있는 듯하면서도 침울하지 않았던 도시.
공항에서 더블린 익스프레스 티켓을 끊어 타고 시내에 도착한 뒤 리피 강을 따라 걸었다. 런던에서 템스강을 처음 눈에 담았을 때는 넓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에 압도되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면,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푸른 리피 강은 고즈넉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조금 걷다가 도착한 더블린 캐슬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미술 작품들을 봤지만 대통령 취임식 장소로 사용된다는 세인트 패트릭 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관광 명소이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나라에서 중요한 공간으로 쓰인다는 점이 독특했다. 홀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은유하는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이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무리 아일랜드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곳에 다른 나라의 열위에 있던 역사가 드러나는 그림을 버젓이 둔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작품의 규모도 의미도 놀라워서 고개를 꺾어 한참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과 잔디가 잘 어울리던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소매치기 목격. 자전거를 탄 남자가 관광객이 멘 핸드백을 낚아채서 도망가는 걸 보고 놀라서 앞으로는 백팩만 메고 다녀야겠다는 대화를 하며 앉아 있었다. 밝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로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어다니던 세인트 패트릭 파크와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던 대성당도 정말 좋았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에 삶을 의탁한다는 점 하나만으로 종교인과 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강이 있다고 생각했었고, 이 생각이 완전히 지워졌다고 말할 자신도 없지만, 유럽에 온 뒤로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무엇이 이렇게도 장엄한 건물을 계획하고 짓고 지켜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을까 하는, 아마도 내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에 대한 신비감이 웅장한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든다.
호텔에 짐을 두고서 기네스 양조장 투어를 갔다. 아일랜드 전통 건배사는 ‘슬란챠~’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찾아보니 건강을 뜻하는 단어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다 같이 시음 잔을 들고서 건배사를 외쳤다. 더블린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던 옥상 바도 기억에 남는다. 투어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에드 시런의 Galway girl을 들으면서 야식을 먹었다. 한 번도 안 깨고 아홉 시간 꿀잠을 잤다.
둘째 날은 날씨가 완벽했다. 충동적으로 들어간 브런치집의 맛있는 파니니, 한적한 리피 강변의 거리,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새들, 미술관 가는 길에 들은 알렉 벤자민의 1994와 싱스리트 OST, 휴무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외관만으로도 좋아서 쉬어갈 수 있었던 현대미술관, 추위를 잊게 하는 선명한 햇살, 더블린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피닉스 파크, 일제강점기의 한국과 닮아 있어서 너무 흥미로웠던 킬만햄 골 뮤지엄, 공원 카페에 앉아서 먹었던 따뜻한 얼그레이 티와 레몬 케이크. 이제껏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모든 영어 설명들을 다 해석하고 이해해보려 했던 적이 없는데 킬만햄 골 뮤지엄에서는 모르는 단어들을 검색해가면서 찬찬히 둘러보고 나왔다.
떠나려니까 반나절이 금방이었다. 비행기 지연으로 험난한 여정을 거쳐 셰필드에 돌아왔다. 김행숙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블린은 ‘덜 말하는 식으로 더 말하는’ 도시 같았다. 추위와 고요와 기개 세 단어로 대충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았던 도시.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더 궁금해지는 짧은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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